당초 궁궐의 각 문은 오위의 호군(護軍)이 당번에 따라 수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1469년(예종 1)에 별도로 수문장을 두어 그 책임을 맡기게 되었다.
그리하여『경국대전』에는 서반(西班)의 4품 이상 중에서 망점(望點 : 후보자에 대한 추천 점수)에 의하여 충차되어 수점(受點 : 선정된 후보자 가운데 원하는 인물을 왕이 점을 찍어 결정함.) 입직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4품 이상의 군직(軍職)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서반직을 지니고서 동반에서 치사(治事)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인원이 모자라 충의위(忠義衛)나 충찬위(忠贊衛) 또는 족친위(族親衛) 가운데서 수문장이 차출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초 수문장은 20인에 불과하였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430인에 이르렀던 적도 있다.
한편,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입직하면서 각 문을 수위하다가 선전관(宣傳官)이 제시하는 표신(標信)에 의해 특별히 개폐하기도 하였는데, 한때에는 그들이 밤에 제대로 직숙(直宿)을 하지 않아서 물의를 빚었던 적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의 수위·입직이 더욱 엄격해지는 가운데 영조 때에 반포된『속대전』에는 수문장이 별도의 정직(正職)으로 되면서 수문장청(守門將廳)이라는 서반의 관아가 새로이 설치, 등재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수문장은 종6품직 5인, 종9품직 18인 등 모두 23인이며,『대전회통』에 이르면 수문장은 29인으로 증가되고 있다. 수문장으로는 수문장청에 소속되지 않은 각전수문장(各殿守門將)이 따로이 있었다.
전주의 조경묘(肇慶廟)·경기전(慶基殿)·선원전(璿源殿)의 수문장이 그들로서 각각 종9품직 1인씩이 배치되도록『대전회통』에 규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