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평면집. 지정면적 7,851㎡. 청백리(淸白吏) 맹사성(孟思誠, 1360 ~ 1438) 집안의 고택(故宅)이다.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大廳)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각각 두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으로 네모뿔대의 초석(礎石)을 놓아 네모기둥[方柱]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공포(栱包)를 짜 얹었는데, 주두(柱頭)는 굽면이 비스듬하고, 첨차(檐遮)의 끝은 비스듬히 끊기고 밑면은 연화두형(蓮花頭形)에 가깝게 초각(草刻)하였다.
살미[山彌]는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이들의 모양은 조선시대 초기의 공포를 닮았다. 이런 성격들은 특히 대청의 종도리를 떠받치고 있는 대공이나 솟을합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종도리를 직선에 가까운 솟을합장으로 결구(結構)하고, 종도리 밑의 장여를 굽면이 사면인 소로로써 물고, 이 소로를 사다리꼴의 대공으로 떠받치고 있다.
이 모습은 옥산(玉山) 독락당(獨樂堂)의 대공과 같은 모양이고, 또 은해사거조암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의 솟을합장 및 대공과 같은 모습인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하나의 목조양식이라 생각한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중앙에 용마루를 가로지르고, 이를 다시 양쪽 방 위의 지붕 용마루가 받아 전후면에 박공을 낸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을 이루고, 방은 온돌바닥과 반자틀 간격을 넓게 만든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대청 정면에는 들어열개의 井자살 창호를 달고, 뒷면에는 밖여닫이 판장문을 달았으며, 방에는 밖여닫이 井자살 창호를 달았다.
앞마당 한 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이라고 한 듯하나, 한편으로는 강학(講學)하던 자리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