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리와 사의리의 경계선을 이루는 산의 능선상에 있다. 고분의 일부는 사의리에 속한다. 능선은 표고 약 170m 내외이다. 1988년임하댐 수몰지구 유적조사의 일환으로 안동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모두 3개 구역으로 나누어 조사된 고분은 조선시대 토광묘(土壙墓) 2기와 고려분으로 추정되는 석곽분 2기를 포함해 모두 51기이다. 이 중 고려 및 조선시대의 민묘 4기를 제외하면 모두 고신라와 통일신라에 속하는 석곽분들이다.
석곽은 모두 산돌을 잘라 벽석을 쌓고 개석(蓋石)이 없이 내부에 흙을 채우고 흙 위로 굵은 강돌을 덮었다. 이는 사의리고분군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으로 지역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 석곽분들은 석곽의 너비에 의해 두 종류로 나뉜다. 너비가 좁은 것들은 40∼90㎝ 정도이며, 넓은 것은 100∼150㎝ 정도이다.
너비가 25㎝로 극도로 좁은 것과 170㎝에 달하는 극도로 넓은 것도 있으나 이들은 예외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너비가 넓은 것은 길이 대 너비의 비율이 커서 대체로 3:1 미만에 속하며, 큰 것은 1.4 : 1의 것도 있다.
너비가 좁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길이 대 너비의 비율이 작아 대체로 3 : 1에서 5 : 1 내외에 속하는데, 7.8:1, 6.66:1의 것도 있다.
석곽의 방향은 산의 능선과 등고선의 방향에 평행하거나 직교하는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너비가 넓은 석곽은 아주 대형의 것을 예외적인 것으로 본다면, 대부분이 능선상에서 능선축과 일치하거나 또는 경사면상에서 등고선과 직교하고 있다.
한편, 너비가 좁은 석곽은 대부분이 능선상에서 능선축과 직교하거나 또는 경사면상에서 등고선과 평행하고 있다. 또 석곽 내의 머리방향은 서향·북향·서북향을 하고 있다. 이는 모두 경사면 아래서 석곽을 향해 왼쪽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부장품은 석곽의 양끝에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토기류는 대체로 석곽을 향해 우측에 있으며, 장신구류는 좌측 또는 중앙부에 있다. 이는 머리를 왼쪽으로 두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석곽 중간부에서 많은 토기류가 출토된 것도 있다.
너비가 좁은 석곽들은 유물구성이 굽다리접시〔高杯〕·목항아리〔長頸壺〕 등의 토기류와 금동환(金銅環)·철도자(鐵刀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너비가 넓은 석곽은 뚜껑접시〔蓋杯〕류와 함께 토기병 등의 토기가 많으며, 허리띠장식을 중심으로 한 청동제나 은제의 장신구류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석곽의 형태에 따라 규격, 방향, 유물의 내용 등이 양분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형태의 석곽이 각각 시대적으로 선후관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너비가 좁고 길이의 방향이 능선상에서 등고선과 평행하는 석곽은 출토되는 고배나 장경호 등의 형식이 약간의 차이는 보이지만, 대체로 5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경주지역 출토 토기들과 비슷해 대개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너비가 넓고 길이의 방향이 능선축과 일치하거나 등고선과 직교하는 석곽은 출토되는 개배류나 토제병, 청동제 장신구 등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둘째 유형의 고분 중 특기할 만한 것은 4인의 합장묘로 추정되는 대형 석곽묘로서, 석곽의 내부의 길이 380㎝, 너비 170㎝로 이 일대의 고분 중 최대의 것이다. 내부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 부분은 전체 석곽의 길이를 약 80㎝ 너비로 나누고 있다.
네 부분의 석곽은 바닥의 형태로 구분된다. 바닥에 아무 시설 없이 진흙만 다진 것, 납작한 강자갈을 깐 것, 두껍고 넓적한 판석을 깐 것, 바닥을 진흙만 다져 넣고 양벽을 세우고 위에 석관뚜껑을 판석으로 덮은 것 등이 있다.
출토유물은 토제완(土製碗)·토제병(土製甁)·청동띠장식·철도자(鐵刀子)·금동태환(金銅太環)귀걸이장식 등이 있다.
판석 뚜껑을 덮은 부분에서는 치아 등 인골과 함께 ‘處郞(처랑)’이라는 명문이 쓰인 청동장식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이 뚜껑을 덮은 석곽은 처랑으로 불리는 귀족의 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