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중사는 7세기 중반에, 백제계 씨족이 창건한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하비키노시[羽曳野市] 노노우에[野野上]에 있는 사찰이다. 백제계 씨족은 후네씨[船氏]이며, 백제 근초고왕의 후손인 왕진이(王辰爾)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 후손들은 고대 일본의 문서 행정의 기틀을 마련하고, 하쿠호[白鳳]·나라[奈良]시대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야중사의 창건 당시 건물은 중세에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근세에 이르러 진언율종의 계율도장으로서 재건되어 부흥을 이루었다.
종파는 진언종(眞言宗)이며, 본존불은 약사여래불이다. 백제 계통의 이주민인 후네씨[船氏] 일족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하여 세운 일종의 씨족 사찰이다. 쇼토쿠[聖德] 태자의 명을 받아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창건했다고 보기도 한다.
후네씨는 6세기 전반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왕진이(王辰爾)[^1]를 시조로 모셨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따르면 왕진이의 조상은 백제 근구수왕의 증손자인 진손왕(辰孫王)으로 나온다. 왕진이는 6세기 전반 일본으로 건너가 양국의 대외 관계에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의 문서 행정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 후예 씨족들로는 후네씨와 함께 후지이[葛井] · 츠[津] 씨도 있다. 모두 가와치([河內], 고대 오사카) 지역에서 기록과 관련된 일을 해서 ‘후히토[史]’라는 성을 받았다. 즉 세 씨족은 모두 공통의 시조를 가지고 있는 백제 계통의 이주민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799년에 스가노 마미치[菅野眞道]가 이 절의 남쪽 산을 이들 세 씨족의 묘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하는 기록을 『일본후기(日本後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후손들 가운데는 도소[道昭] · 지쿤[慈訓] · 교순[慶俊] 등 하쿠호 · 나라시대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중세 시기의 이 절에 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안화전치씨군충장안(岸和田治氏軍忠狀案)』에 의하면 1337년 3월 2일부터 10일까지 이 사찰 부근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 전란으로 말미암아 사찰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뒤 1600여 년경에 세이켄[政賢]이 사이다이지[西大寺]의 승려인 지닌[慈忍]을 초빙하여 계율도량(戒律道場)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이때 이 절의 이름을 권학원(勸學院)이라 하였으며, 주로 율종(律宗)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아울러 이 지역의 유력자인 다카기[高木] · 호조[北條] · 야나기자와[柳澤]라는 세 집안을 이 절의 신자로 귀의시킴으로써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의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인 경내의 주2과 객전(客殿)은 야나기자와 씨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이와 함께 666년 제작된 하쿠호[白鳳] 시기의 대표적인 금동불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본당인 용호전(龍護殿)을 비롯하여 대사당(大師堂) · 객전 · 식당(食堂) · 지사료(知事寮) · 고리(庫裏) · 주3 · 종루(鐘樓)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1716~1736년 사이에 소실되어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1746년에는 에도막부(江戶幕府)의 허가를 받아 여법율종윤번소(如法律宗輪蕃所)가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율종을 공부하는 비구료(比丘寮) · 사미료(沙彌寮)라는 두 개의 승방을 건립하였다.
또한, 경내에 서 있는 산다화(山茶花)는 오사카부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옛 사적지에는 남대문(南大門) · 중문(中門) · 금당(金堂)의 유적지와 삼층탑의 심초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국가 지정 사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특히 심초석은 윗면에 선각(線刻)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 기둥 1개와 보조 기둥 3개가 들어갈 수 있도록 구멍을 낸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