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寺傳)」에 의하면 744년에 쇼무왕[聖武王]의 명에 의해 백제계의 후손인 행기(行基)가 창건하였다. 행기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왕인의 후예로서 성(姓)은 고시[高志]이다. 창건 당시에는 칠당가람(七堂伽藍)을 갖추고 있었으며 또 당우도 150여 개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굉장하였다고 한다.
현재 소속종파는 천태종(天台宗)에 속해 있다. 사호(寺號)는 용곡산(龍谷山)의 관음원(觀音院)이라고도 한다. 본존은 성관세음보살상(聖觀世音菩薩像)이다. 일반적으로 미즈마관음[水間觀音]이라 하는데 잡귀를 물리치는 데 영험이 있다고 한다.
「화천국사청선안(和泉國司廳宣案)」에 의하면 1227년에 이 절은 면전(免田), 즉 과세되지 않는 7정(町)의 논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북조시대에는 남조(南朝)의 편을 들어 남조의 조정으로부터 별당직(別堂職)이라는 직책과 사령(寺領)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387년 11월 24일에는 북조가 면전을 인정하지 않는 문서를 발행하고 있었다. 그 뒤 1395년 7월 2일에는 이즈미[和泉] 지역을 관장하는 무사인 대내의홍(大內義弘)이 절의 수리를 위해 논 5정 7반(反)을 기부하였다.
또 1523년 2월 15일에는 삼일산도수(三日山道樹)가 논을 기증하였다. 1537년 12월 13일에는 노다산성주[野田山城主]인 송포비전수(松浦肥前守)가 전지 등을 기부한 것 등으로 미루어 이 지역의 무사들로부터 신앙을 두텁게 받아 번영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585년 3월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측의 공격을 받아 약사당(藥師堂)과 개산당(開山堂)을 제외한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되었다. 심지어 1456년 이후 줄곧 사용해 왔던 동종(銅鐘)마저 원천사(願泉寺)에 팔았다.
그러나 근세에 접어들어 이 절은 도요토미 백모의 사위인 소출수정(小出秀政)이 가시와다성[岸和田城]의 성주가 되자 그의 기원소(祈願所)로 되었다. 1638년에는 같은 성의 성주이었던 송정강중(松井康重)이 많은 논밭의 전지를 이 절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성주가 된 오카베[岡部]도 토지를 기부하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연보연간(延寶年間:1673∼1681)에는 금당(金堂)과 진수사(鎭守社)을 재건할 수 있었다.
또 원록연간(元錄年間:1688∼1704)에는 삼중탑(三重塔)·호마당(護摩堂)·식당(食堂)을 다시 건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84년에는 화재가 일어나 당우 중 본당(本堂)과 오층탑(五層塔)·식당을 소실하고 말았으나, 1827년에 강부씨에 의해 재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경내에는 본당을 비롯해 삼층탑·경당(經堂)·관음원(觀音院)·애염당(愛染堂)·개산당(開山堂)·변천당(弁天堂)·약사당·남원(南院) 등이 있다. 그리고 애염당의 앞에는 「오색오인녀(五色五人女)」·「오십년기가염불(五十年忌歌念佛)」이라는 근세소설의 등장인물로 유명한 오나츠와 청십랑(淸十郎)의 묘지석이 남아 있다.
또, 이 절에서는 매년 1월 2일과 3일이 되면 가느다란 나무막대기 1,000개를 가지고 떡을 찧는 특이한 행사가 치러진다. 이 절은 신사국 33소(新四國三十三所) 중 네 번째의 순례지로 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