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대사는 8세기 초 한반도계 이주민들이 창건한 일본 도쿄도[東京都] 조후시[調布市] 진다이지모토마치[深大寺元町]에 있는 사찰이다. 정식 명칭은 후각산 쇼라쿠인 진다이지[浮岳山昌樂院深大寺]이다. 본존은 보관아미타여래상이다. 「연기(緣起)」에 따르면 733년 만공상인(滿功上人)이 심사대왕(深沙大王)을 모시고 법상종 사원으로 창건하였지만, 859년 천태종으로 개종되었다. 이후 후각산 진다이지라는 칙액(勅額)을 받고 진호국가(鎮護國家)의 도량이 되었다고 한다.
진다이지라는 이름은 인도 구법승이었던 현장삼장(玄奘三藏)을 수호하는 수신(水神)인 심사대왕(深沙大王)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733년 만공상인(滿功上人)이 법상종(法相宗) 사원으로 창건하였지만, 859년 천태종으로 개종되었다.
이 절의 창건에 대한 사실은 명확하지 않으나 고마[拍][^1]라는 지명과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연기설화(緣起說話)를 통하여 고구려 또는 백제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쇼무천황[聖武天皇, 724년∼749년] 때, 이곳 마을에 백제에서 이주해 온 우근(右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지역의 처녀인 호녀(虎女)와 혼인을 하였다. 이윽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 딸이 자라서 근처에 살던 고구려인 복만(福滿)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딸이 걱정된 부모는 호수 안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집을 짓고 그곳에 딸을 가두었다. 복만은 호수를 건너갈 수 없어 수신(水神)에게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타게 빌었다. 그러자 물 속에서 한 마리의 거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는 거북이의 등을 타고 섬으로 건너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결혼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아이는 자라서 불문(佛門)에 출가하였으며, 그 뒤 중국에 건너가 법상종을 배운 다음 귀국하여 진다이지[深大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가 바로 개산(開山)의 만공상인이다. 그 뒤 만공상인은 수신을 모시고자 하였으나 수신의 모습을 알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라에서 건너온 수신의 화상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표본으로 삼아 상을 조각하여 안치하니 그것이 본존인 심사대왕이다.
이상의 전승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절을 창건한 것은 고구려계 후손이지만 그의 외조부는 백제계이며, 또 그의 부모를 결합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수신은 신라 신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이 절은 이 지역에 살던 고구려계의 이주인들이 창건하려 했을 때 백제와 신라 계통의 이주민들도 협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설화가 나름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음은 이 지역의 구가(舊家)인 이시이(石井) 집안의 문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문서에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심대사의 국보도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우는 주2에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 본당인 대사당(大師堂)은 근대에 들어서 재건되었다. 이밖에 절 입구의 산문(山門)을 비롯하여 고리(庫裡) · 서원(書院) · 종루(鐘樓) 등이 있다. 주요 국가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동조석가여래의상(銅造釋迦如來倚像)이 있다. 이 불상은 일본 관동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7세기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14세기에 주조된 범종은 국가중요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 창건 설화가 기록된 「연기회권(緣起繪卷)」은 1650년에 57대 주지인 변성상인(弁盛上人)이 제작한 것이다.
심대사 홈페이지에서 창건설화를 비롯하여 가람구조 및 소장 국가유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