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승락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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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8세기 중반에, 일본 사이타마현[琦玉縣] 히다카시[日高市] 니호리[新堀]에 있는 고구려계 승려 쇼라쿠[勝樂]가 고려왕 약광(若光)을 위해 창건한 사찰.
이칭
이칭
쇼라쿠지[勝樂寺]
유적/건물
건립 시기
8세기 중반
소재지
일본 사이타마현[琦玉縣] 히다카시[日高市] 니호리[新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승락사는 8세기 중반에 일본 사이타마현[琦玉縣] 히다카시[日高市] 니호리[新堀]에 있는 고구려계 승려 쇼라쿠[勝樂]가 고려왕 약광(若光)을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진언종에 속해 있으며, 정식 명칭은 고려산 쇼덴인 쇼라쿠지[高麗山聖天院勝樂寺]이다. 고구려의 왕족이었던 약광(若光)이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쇼라쿠가 약광의 수호불이었던 성천상(聖天像)을 본존으로 모신 데서 비롯된다. 그의 제자이며 약광의 아들인 성운(聖雲)이 완성하였다. 1345년에 진언종으로 개종하여 중흥을 맞이했고, 이후 54개의 말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목차
정의
8세기 중반에, 일본 사이타마현[琦玉縣] 히다카시[日高市] 니호리[新堀]에 있는 고구려계 승려 쇼라쿠[勝樂]가 고려왕 약광(若光)을 위해 창건한 사찰.
연원 및 변천

진언종주1에 속해 있으며, 주2은 성천상(聖天像)이다. 공식 명칭은 고려산 쇼덴인 쇼라쿠지[高麗山聖天院勝樂寺]이다. 명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절은 고구려와 관계가 깊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해 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일본 동북지역에 분산 거주하고 있었는데, 716년에 1,799명을 무사시국[武藏國]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정착한 곳을 고려군(高麗郡)이라고 하였는데, 현재 히다카시[日高市] 지역에 해당한다. 이때 고려군의 주민들을 통솔한 인물이 고구려의 왕족인 약광(若光 : ?~748)이었다.

748년에 약광이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751년에 그의 시념승(侍念僧)이었던 쇼라쿠가 약광이 고구려에서 가지고 온 성천상(聖天像)을 본존으로 안치하며 건립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 절은 일명 고려산 쇼라쿠지[高麗山勝樂寺]라고도 한다. 그런데 쇼라쿠가 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자, 그의 제자이며 약광의 셋째 아들인 성운(聖雲)과 손자인 홍인(弘仁)이 쇼라쿠의 유지를 받들어 절을 완성하였다. 이에 당시에는 고려씨의 주3 역할을 했다.

1784년 편찬된 『고려대명신유서서(高麗大明神由緖書)』와 1878년의 『무장국고려군고려향고전(武藏國高麗郡高麗鄕古傳)』에 의하면 고려군 일대는 황무지였는데, 약광 일행에 의해 개발되면서 번영을 맞이했다고 한다. 약광이 고령으로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이 약광을 고려대명신(高麗大明神)으로 숭상하였다. 현재 쇼라쿠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약광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고려신사(高麗神社)가 있다.

쇼라쿠지는 창건 이후 표방한 종파가 법상종(法相宗)이었으나, 1345년 히데미[秀海]라는 승려에 의하여 진언종(眞言宗)으로 개종된 후 중흥을 맞았다. 에도[江戶]시대[^4]에는 54개의 주5를 거느릴 정도로 번영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고려군이라는 행정 지명은 메이지[明治]시대까지 존속했다.

현황

현존하는 주6로는 본당(本堂)을 중심으로 출입문에 해당하는 주7주8 · 홀문(惚門)이 있다. 본당은 1690년대에 재건되었으며, 본존으로는 주9이 모셔져 있다. 본당 좌측에는 약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산문은 2층 누각으로 되어 있는데, 1830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1833년에 완성되었다. 문의 좌우에는 주10주11이 모셔져 있으며, 누각의 2층에는 대일여래 · 주12 · 십육나한(十六羅漢)이 안치되어 있다.

아미타당은 아시카가시대[足利時代]에 건립된 것인데,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1704∼1710년 사이에 다카오카[高岡]라는 마을에 사는 카네코로쿠자에몽[金子六左衛門]이 부모를 위해 이를 다시 개축한 것이라고 전한다. 이곳의 본존으로는 백제 후손인 승려 교기[行基]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아미타여래삼존(阿彌陀如來三尊)과 시왕존(十王尊)이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과 흡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홀문은 1624∼1643년 사이에 지어졌고, 1974년에 개축되었다. 중요 문화유산으로는 범종(梵鐘) · 악구(鰐口) · 덕천장군가사영기진장[德川將軍家寺領寄進狀] · 판비(板碑) 및 고려왕 약광의 묘-일명 고령왕묘- 등이 있다. 한편 이곳에는 주13주14 중 희생된 한국인들의 명복을 기리는 재일한민족 무연고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홈페이지에는 이 절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주15 구조 및 문화유산 소장 현황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日本書紀』
『續日本紀』

단행본

『歸化人と社寺』 (今井啓一, 綜藝舍, 1969)
『歸化人と東國』 (今井啓一, 綜藝舍, 1977)
『日本に殘る古代朝鮮』 (段熙麟, 創元社, 1978)
『日本の中の朝鮮文化』 (金達壽, 講談社, 1983)
『高麗郡 1300年』 (埼玉縣立歷史と民俗の博物館, 2016)
주석
주1

대일삼부경 따위에 의거하여 양계를 세워, 다라니의 가지(加持)의 힘으로 자기 몸이 곧 부처가 됨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파. 인도에서 일어나 중국 당나라에 전해져, 금강지의 제자 불공(不空)에 이르러 대성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문무왕 4년(664)에, 혜통(惠通)이 당나라 선무외 삼장(三藏)으로부터 인결(印訣)을 받아 와 연 것으로 전한다. 우리말샘

주2

법당에 모신 부처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부처. 우리말샘

주3

조상의 묘 · 위패를 모신 절.

주4

일본 역사의 시대 구분 가운데,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대장군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연 때부터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준 때까지의 시기. 봉건 사회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며, 쇼군(將軍)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ㆍ지배하던 시기이다. 우리말샘

주5

불교의 한 종파의 우두머리인 큰절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큰절에서 갈라져 나온 절. 우리말샘

주6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절 또는 절의 바깥문. 우리말샘

주8

아미타불을 본존(本尊)으로 모신 집. 우리말샘

주9

팔대 명왕의 하나. 중앙을 지키며 일체의 악마를 굴복시키는 왕으로, 보리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여 이렇게 이른다. 오른손에 칼, 왼손에 오라를 잡고 불꽃을 등진 채 돌로 된 대좌에 앉아 성난 모양을 하고 있다. 제개장보살의 화신으로 오대존명왕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말샘

주10

바람을 주관하는 신. 우리말샘

주11

천둥을 맡고 있다는 신. 우리말샘

주12

중생이 갖가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여러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 중생을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복덕을 얻게 해 주는 일곱 관음. 천수관음, 마두관음, 십일면관음, 성관음, 여의륜관음, 준제관음, 불공견삭관음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3

‘간토 대지진’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 우리말샘

주14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이 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우리말샘

주15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우리말샘

집필자
박재용(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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