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지구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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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3사단이 1950년 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동해안의 영덕지역에서 유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제5사단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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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군 제3사단이 1950년 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동해안의 영덕지역에서 유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제5사단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
경과

1950년 6월 27일 강릉을 점령한 북한군 제5사단은 이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이 대관령∼제천으로 철수한 후, 국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동해안 축선을 따라 남하하였다. 이들은 7월 1일 울진을 점령하고, 7월 12일 영덕 북쪽 1㎞지점인 평해까지 진출하였다.

국군 제8사단이 내륙으로 이동한 후 동해안 지역은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본래 국군 제3사단은 예하에 2개 연대를 두고 있었지만, 전쟁 발발 직후 제22연대가 전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제23연대만이 영남지역을 방어하게 되었다. 제23연대는 7월 16일 영덕 북쪽 4㎞지점의 활인산∼237고지∼매정동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과 대치하였다.

북한군 제5사단은 7월 16일 야간을 이용해 공격을 개시했으며, 국군 제23연대는 제대로 된 교전도 못한 채 영덕을 북한군에게 빼앗겼다.

포항 방어를 위한 마지막 보루였던 영덕이 피탈되자, 큰 충격을 받은 미 제8군은 동해안의 해군력을 증강하고 오천비행장의 미 제35전술비행단 제40전투비행대대로 하여금 국군 제23연대를 직접 지원하게 하였다.

유엔 해·공군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국군 제23연대는 7월 17일 반격을 감행하여 영덕을 일시 탈환하였으나, 그 뒤에 다시 빼앗기고 빼앗는 혈전을 반복하게 되었다. 격전이 반복되는 동안에 국군 제3사단 전술지휘소가 강구로 이동하고, 26일에는 개전 초기 수도권에 투입되었던 제22연대가 원대복귀하였다.

제22연대의 증원으로 전투력이 배가된 국군 제3사단은 유엔 해·공군의 근접지원을 받으면서 영덕·강구 일대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안동지역으로 남하한 북한군 제12사단이 동남진하여 1950년 8월 10일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하고, 다음 날인 8월 11일 포항을 점령함에 따라 국군 제23연대는 적중에 고립되었다.

국군 제23연대는 이와 같이 포위된 가운데에서도 구계동∼월포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후, 8월 17일 유엔 해군의 지원하에 독석동에서 해상철수를 단행하여 구룡포로 이동하였다.

결과

영덕지구전투는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물론 7월 하순까지 포항을 점령하려던 북한군 제2군단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 제5사단은 40% 이상의 전투력을 잃어 이를 회복하기 위해 부대정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문헌

『우리가 겪은 6·25전쟁』(대한민국육군협회, 2013)
『6·25전쟁사 : 낙동강선 방어작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한국전쟁』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안강-포항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집필자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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