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 1.22m. 신라시대의 명찰이었던 갈항사 터에는 현재 이 불상 외에도 비로자나석불좌상(毘盧遮那石佛坐像) 1구와 신장상(神將像)이 부조된 석재 등이 남아 있으며, 김천 갈항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은 1916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현재 이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보호각은 옛 금당지(金堂址)로 추정되는 곳이다. 등신대(等身大)의 불상으로, 불신(佛身)과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새겨진 상대석만 남아 있고, 광배와 하대석은 남아있지 않다.
불상은 무릎 부분과 손가락들이 다소 떨어져 나갔을 뿐, 나머지 부분은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머리카락은 둥근 나발(螺髮)로 표현했다. 정수리의 얕고 둥근 육계(肉髻)와 더불어 아담한 머리 윤곽은 경주 석굴암 석굴의 본존불이나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형태와 유사하다.
얼굴은 매우 동그란 편인데,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의 얼굴을 계승하면서도 좀 더 양감이 줄어들었다. 작은 입과 아담한 코, 반쯤 뜬 가는 눈, 둥그런 턱 등 전체적인 인상은 온화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으로,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의 북면부조보살상(北面浮彫菩薩像)이나 석굴암 석굴의 감실보살상(龕室菩薩像) 등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신체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선으로 처리되었으나 위축되거나 가냘픈 편은 아니다. 비교적 넓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은 골격이 뚜렷하면서도 양감이 있으며, 팔의 근육도 잘 묘사되었다. 반면에 허리는 잘록하여 신체의 굴곡이 잘 표현된 육감적인 조각 수법을 보인다. 이런 특징은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의 본존불이나 약수계 석불상,석굴암 석굴의 본존불상 등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들보다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것은 8세기 중엽의 불상이 가지는 독특한 개성미라 하겠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신체에 비하여 넓고 중량감이 있는 두 무릎은 이 불상의 자세를 보다 안정감 있게 만든다.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얹어 가부좌를 틀었으며 두 다리 근육은 탄력 있고 긴장감 있게 표현된 것 또한 이 불상의 사실성을 보여준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는데, 석굴암이나 칠불암의 본존 등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의 본존처럼 왼손을 거의 오른발 위에 올려놓은 것이 특색이다.
대의는 8세기 중엽에 성행하던 편단우견(偏袒右肩)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인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므로, 삭제) 옷은 얇아 신체의 굴곡이 잘 드러나며 옷 주름은 유려한 것이 당시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준다.
대좌는 팔각대좌로, 연꽃이 짧고 뚜렷하며 양감이 풍부하다는 점에서도 시대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불상 뒤에는 광배를 꽂았던 구멍 자리가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이상적인 인체를 상징하는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온화하면서도 세련미가 넘쳐, 경주 석굴암 석굴의 감실보살상,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중 북면보살상,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중 사면불상 등과 친연성이 강한 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준다.
758년(경덕왕 16) 원성왕이 되기 전인 김경신(金敬信)이 외가에서 갈항사를 중창하고 석탑을 조성하였다는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기단부에 새겨진 조성기(造成記)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불상은 석탑과 함께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불상이 758년에 조성된 것이 확실하다면 신라 조각사의 편년에 절대적인 자료로서, 신라 조각 최성기의 양식을 반영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