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용언궁(龍堰宮)이라 한다. 1106년(예종 1) 태사령(太史令) 음덕전(陰德全) 등 여러 술사(術士)가 “송도(松都 : 지금의 경기도 개성)는 도읍을 정한 지 200년이 되어 지덕(地德)이 쇠하여 기업(基業)을 연장시키려면 마땅히 서경의 용언(龍堰) 옛 터에 새로 궁궐을 짓고 때로 순행(巡幸)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예종은 사천소감(司天少監) 최자현(崔資顯), 태사령 음덕전, 주부동정(注簿同正) 김위제(金謂磾) 등을 보내어 용언 옛 터를 점쳐 살피게 하고, 양부(兩府 : 宰樞)와 장령전(長齡殿) 수교유신(讐校儒臣)에게 새로 궁궐을 짓는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오연총(吳延寵)이 민력과 재력의 소모를 들어 반대하므로 일단 보류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평장사 최홍사(崔弘嗣)가 전일의 태사관(太史官)의 주청을 들어 새 궁궐 짓기를 청하므로 예종은 마침내 이를 결정하여 1116년에 그 낙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그해 서경에 행차하여 그곳의 장락궁(長樂宮)ㆍ구제궁(九梯宮) 등을 거쳐 용덕궁에 이어(移御)하였으며, 다음날에는 건원전(乾元殿)에서 여러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거기에서 유신교서(維新敎書)를 반포하였다. 용덕궁터는 평양의 을밀대 남쪽, 일제강점기에 평양박물관이 들어선 자리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