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덕궁 ()

목차
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평양직할시 금수산 을밀대 남쪽에 비정되는 고려전기 제16대 예종 연간에 건립된 궁궐.
이칭
이칭
용언궁(龍堰宮)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금수산 을밀대 남쪽에 비정되는 고려전기 제16대 예종 연간에 건립된 궁궐.
내용

일명 용언궁(龍堰宮)이라 한다. 1106년(예종 1) 태사령(太史令) 음덕전(陰德全) 등 여러 술사(術士)가 “송도(松都 : 지금의 경기도 개성)는 도읍을 정한 지 200년이 되어 지덕(地德)이 쇠하여 기업(基業)을 연장시키려면 마땅히 서경의 용언(龍堰) 옛 터에 새로 궁궐을 짓고 때로 순행(巡幸)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예종은 사천소감(司天少監) 최자현(崔資顯), 태사령 음덕전, 주부동정(注簿同正) 김위제(金謂磾) 등을 보내어 용언 옛 터를 점쳐 살피게 하고, 양부(兩府 : 宰樞)와 장령전(長齡殿) 수교유신(讐校儒臣)에게 새로 궁궐을 짓는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오연총(吳延寵)이 민력과 재력의 소모를 들어 반대하므로 일단 보류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평장사 최홍사(崔弘嗣)가 전일의 태사관(太史官)의 주청을 들어 새 궁궐 짓기를 청하므로 예종은 마침내 이를 결정하여 1116년에 그 낙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그해 서경에 행차하여 그곳의 장락궁(長樂宮)ㆍ구제궁(九梯宮) 등을 거쳐 용덕궁에 이어(移御)하였으며, 다음날에는 건원전(乾元殿)에서 여러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거기에서 유신교서(維新敎書)를 반포하였다. 용덕궁터는 평양의 을밀대 남쪽, 일제강점기에 평양박물관이 들어선 자리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