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 있다. 봉분은 부인묘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2단 장대석의 호석을 두른 장방형이다.
쌍분의 중앙 전면에는 묘비 1기가 있고, 쌍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각각 1기씩 놓여 있으며, 그 좌우에는 문인석이 각각 2기씩 모두 4기가 배치되어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정제(三段庭制)로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서희는 942년(태조 25) 태어났으며,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한 뒤 내의시랑을 거쳐 983년(성종 2) 병관어사ㆍ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고, 태보ㆍ내사령의 최고직에 올랐다.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993년, 소손녕 지휘하에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해 왔다. 고려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전의(戰意)를 상실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주장과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할지론(割地論)까지 제기되었고, 왕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서희가 단신으로 적진으로 가서 소손녕과 담판하여 80만 대군을 물러가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994년에는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에 있는 여진 세력을 축출하고 압록강까지 고려의 생활권을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