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년 작. 높이 2.3m(現高 2.1m). 1985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거대한 절벽의 바위 면이 세모꼴로 떨어져 나간 곳에 감실형으로 쪼아 부조를 새긴 불상이다. 오른쪽 어깨 옆의 바위 면에는 3행 31자의 불상조성기가 새겨져 있다.
거구의 이 불상은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부조한 반면 하체로 내려가면서 얕게 도드라지게 새겼다. 얼굴이 큰 데 비하여 손이 유난히 작고, 눈이 가늘면서 입 주위를 움푹 들어가게 하여 파격적인 미소 띤 얼굴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발목 부분이 불분명해지는 등 우열의 수법이 공존하는 독특한 조각이다.
머리 정상부는 선각으로 구획한 육계(肉髻)가 솟았는데 큼직한 팽이형으로 육계와 머리는 선으로 구별짓고 있을 뿐이며, 머리칼은 소발이다.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꽤 풍만한 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입 좌우를 들어가게 하여 만면의 미소를 표현하였다. 눈썹은 반달형으로 코는 좁고 오뚝한 편이다. 입은 폭이 좁고 작아서 인상적이다.
이 입은 코끝에서 턱을 이루면서 반달 같은 보조개를 이룬 표정과 함께 만면한 미소를 띠고 있다. 더구나 눈을 가늘게 만들어 눈웃음을 짓게 한 표현과 더불어 파격적으로 미소 짓는 얼굴 모습을 이루게 하였다. 이로써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신체는 원통형인데 어깨는 비교적 자연스럽고 가슴은 양감 없이 밋밋하게 표현되었다. 하체의 처리 또한 상체와 비슷하여 두 다리는 굴곡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무릎 아래 하반신의 표현이 불분명하고 발은 나타내지 않았다.
용봉산의 봉우리에 있는 홍성신경리마애석불(보물, 1963년 지정)과 마찬가지로 다른 돌에 발을 새겨 끼워 놓았던 것으로 아무렇게 놓여 있었던 것을 앞에다 옮겨 놓았다. 다른 돌로 발을 표현하는 수법은 이 시대 비상(碑像)인 인양사조사상의 예도 있어서 마애불의 발 표현의 한 방법으로 유행하였던 것 같다.
불의는 통견의(通肩衣)인데 가슴의 옷깃이 불분명하지만, 목 주위로 돌고 있어서 굽타 불상 착의법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옷주름은 무릎까지 전신에 걸쳐 U자형을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무릎 밑은 군의(裙衣)를 세로선으로 나타냈지만 불분명하게 처리되었다.
광배(光背)는 바위를 파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주위를 깊게 새겨 감실형의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을 형성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머리 위에서부터 바위 면이 삼각형으로 떨어져 나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이 불상의 인상을 흐리게 하고 있다.
이처럼 이 불상은 일면 불균형한 점도 있어서 고려 조각 양식과 상통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일면 자연스러운 신라식 수법도 보여 주고 있어서 지방 양식이 강하게 나타난 통일신라 불상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조성기 명문(銘文)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貞元十五年己卯四月日仁符(入村?)
○佛願大伯士元烏法師
○香徒(行?) 官人長珎大舍
위의 31자의 조성기를 보면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인 799년(소성왕 1년) 4월에 조성된 작품이다. 작가(元烏法師) · 발원자(長珎大舍) 등도 있어서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연구에 한 기준 작품이 된다는 점에서 이 불상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용봉산 상봉 신경리마애석불의 편년 설정에도 결정적 자료로 평가되며, 특히 지방 마애불상인 경우 신라 말기부터 지방 양식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