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흙으로 빚어 만든 소불상을 대량으로 발굴하였다. 이들은 학술적으로 정식 발굴된 것이며,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 불상으로 우리 나라 고대 조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이 절터에서 출토된 고구려 불상은 불좌상(佛坐像)과 보살입상의 두 종류이다. 각기 하나의 틀에다 대량으로 만들어 가마에 넣고 구워낸 소조상이다. 만든 기법은 고구려 기와[瓦當]와 흡사하며 여기에 채색 안료로 불상을 칠해서 퍽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불좌상들은 완전한 것은 거의 없으나 가장 완전한 것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대좌나 불신은 한 틀로 만들어졌고, 옷자락이 대좌까지 덮어 내렸기 때문에 서로 구분할 수 없다. 짧은 상체에 두 팔꿈치를 넓게 구부려 손을 깍지 낀 이른바 중국식 선정인(禪定印 :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앞에 손을 놓은 모양)을 짓고 있다.
이런 자세는 뚝섬불상이나 군수리불좌상 등 6세기 내지 그 이전의 우리 나라 불상에 유행하던 자세와 흡사하다. 그리고 고분 벽화인 쌍영총의 묘 주인공과 보다 더 비슷하다.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 반개한 눈, 날씬한 코, 미소 띤 입 등 귀족 취향의 고귀한 불격을 성공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
이 점은 신체에도 그대로 연장되고 있다. 어깨는 좁고 가슴은 밋밋하여 팽팽한 긴장감이나 강건한 기풍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손을 배에 대고 깍지 낀 선정인의 자세에서 부드럽고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의 전체적인 조형성은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의 역동미와는 달리 적정미(寂靜美)를 구현하는 데 최대의 역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보살입상 역시 불좌상과 마찬가지로 온화하고 고귀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 고졸하고 은근한 미소, 부드러운 얼굴, 근육의 부피감 등은 물론, 비록 옷 속에 감싸여 부피감을 완벽하게 느낄 수는 없지만 부드러운 굴곡, 곡선적인 형태미 등에서 당대 귀족들의 고상한 기품을 명쾌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보살상의 양식적 특징은 중국의 경우 6세기 1/4분기의 북위불(北魏佛) 및 2/4분기의 동·서위불(東西魏佛)인 이른바 남북절충양식[華化樣式]과 직결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백제 군수리보살상 내지 정림사불상 같은 6세기 중엽 불상 양식과 비슷하다.
더구나 이 불상은 대량 출토된 예로 보아 대승 불교 사상의 핵심인 무수한 불이 하나의 불(佛)로 귀일한다는 천불 신앙(千佛信仰)을 상징하는 천불상(千佛像)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고구려 작품이 확실한 연가7년명불상과 더불어 당대 고구려 불교 신앙의 한 핵을 밝힐 수 있다는 데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