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책. 목활자본. 정확히 언제 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행장에 1891년(고종 28) 그의 정려(旌閭)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91년 이후 현손 중섭(重燮) 등이 편집,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도서·영남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시 76수, 권2에 서(書) 2편, 서(序) 1편, 기(記) 4편, 제문 16편, 축문 1편, 행장 5편, 잡저 4편, 권3에 부록으로 행적·행장·정려기·묘표 각 1편, 제문 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의 「본부사림상방백서(本府士林上方伯書)」는 정유왜란 때 순절한 이복남(李福男)·정기원(鄭期遠) 등 8명의 사당은 건립되었으나, 그들의 공적을 기록한 서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공간(公刊)하자고 건의한 글이다.
「월암기(月巖記)」·「석수암기(石水庵記)」·「석가산기(石假山記)」 등은 저자 자신이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끊고 자연 속에서 유한한 생활을 했음을 잘 반영해주는 글이다. 특히 「석가산기」는 당송팔대가인 소순(蘇洵)의 「목가산기(木假山記)」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산문의 품격도 갖추고 있다.
이 밖에 문집의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문학작품보다는 실용문을 주로 썼으며, 시 세계에 있어서도 세속의 혼탁을 벗어나 고답적인 세계를 구가한 작품이 많다. 「만회(晩懷)」·「삼구음(三口吟)」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서적을 벗삼고 천성을 보전하며 난세에 은둔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칠언율시 「갑술음(甲戌吟)」은 흉년에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시각으로 묘사한 것이다. 가적 차원에서 백성을 구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19세기에 백성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려고 했는지를 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