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과 광복군총영, 독립의용군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8년(고종 35)
사망 연도
1920년
출생지
평안남도 강동
관련 사건
3·1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과 광복군총영, 독립의용군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평안남도 강동 출신이다. 이명은 김희준(金熙俊)·장비(張飛)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간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독립의용군(獨立義勇軍) 소속의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유성삼은 1919년 3월 강동군(江東郡) 삼등면(三登面)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일제의 검거를 피해 표영준(表永俊)·주석환(朱錫煥)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본부를 둔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 그는 일제 관공서 및 고위관리를 암살·처단할 것을 지시받고 1919년 11월 표영준과 함께 이에 쓸 총을 국내에 반입했다.

중국의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본부를 둔 한족회(韓族會),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大韓獨立靑年團聯合會),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 김석황(金錫璜)이 이끄는 의용단(義勇團) 등이 광복군총영으로 재편되자, 그는 여기에 가입했다.

1920년 3월 광복군총영 소속의 국내 독립운동가와 연계하여, 평양의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독립의용단(獨立義勇團)을 조직하고, 테러와 암살을 통한 의열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해 7월에는 평양에서 김석황·김예진(金禮鎭)·장혜근(張惠根) 등의 동지들과 회합하고 평남 제3부와 평양경찰서, 그리고 평양부청(平壤府廳)을 폭파할 것을 협의·결정했다.

그리고 유성삼은 표영준과 함께 반입한 권총과 탄환을 여행렬(呂行烈)에게 은닉하도록 했다. 8월 2일에는 표영준·김예진 등과 함께, 세 대로 나누어 앞에서 말한 세 목표물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8월 3일 표영준과 함께 「관공리의 퇴직을 명령함」·「정탐자에게 회개를 명령함」·「자산가에게 독립자금 출연을 권고함」·「일반국민에게 거의를 명령함」 등의 광복군총영 명의의 경고문을 평양 시내 곳곳에 뿌렸다.

그리고 평남 제3부 청사에 폭탄을 던져 파손시키고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은신했다. 같은 달 7일에는 표영준 등과 함께 평남 제3부 소속 경찰관이 탑승한 자동차를 총격하여 이들을 살해하기로 계획하고 9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오인하여 민간인 자동차에 사격을 가하고 은신했다. 그는 도피 중인 8월 16일 평양의 신양리(新陽里)에서 동지들의 오발탄에 맞고 며칠 후 기홀병원에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 13(국가보훈처, 1996)
집필자
조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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