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희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와 신생활사 등 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신계단』 등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이칭
필명
진희(眞希), 유무아(兪無我)
갑세(甲世), 무아(無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3년 2월 11일
사망 연도
1949년 8월 31일
출생지
충청남도 예산
주요 경력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한국민주당 조사부장|한국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1992)
관련 사건
사회주의 필화사건|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유진희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와 신생활사,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신계단』 등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잡지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해방 공간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 정치 활동에 매진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와 신생활사 등 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신계단』 등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인적 사항

유진희(兪鎭熙)는 1893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갑세(甲世) · 무아(無我)이다. 1910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사립학교인 배영학교(培英學校)에 입학하였고, 1914년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주요 활동

1919년경 경성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두게 되어 1920년 4월 박중화(朴重華) · 박이규(朴珥圭) · 차금봉(車今奉) · 오상근(吳祥根) · 신백우(申伯雨) ·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창립에 참여하고 편집부를 맡았다. 같은 해 가을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 월간종합잡지 『개벽(開闢)』 6월호에 "순연한 민중의 단결이 되라"라는 기사로 인하여 필화사건이 일어나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고, 발행인 이두성(李斗星)도 1920년 12월 28일에 동대문경찰서에 호출되어 50원의 벌금형을 받기도 하였다.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경성본회 예비 정기총회에서 조선노동공제회 제1회 연합 정기총회 경성본회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대표자회의’에 국내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내지간부로 선임되고, 기관지부를 담당하였다.

1921년 6월 경성의학전문학교 맹휴운동이 일어났을 때 경성의전동창회 조선인 대표로서 중재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9월 "한국 인민은 글월을 태평양회의에 드림"이란 청원문에 조선노동공제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1년 창간된 잡지 『대중시보』에 글을 싣기도 하였다.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문제를 계기로 상하이파가 분열될 때 김명식(金明植)을 중심으로 한 신생활사(新生活社)에 참가하여 1922년 3월 15일 잡지 『 신생활』이 창간될 때 기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4일 잡지 『신생활』 11호는 '러시아혁명 5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이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였다가 식민지 시기 국내 최초로 발생한 ‘사회주의 필화사건’으로 인하여 김명식, 신일용(辛日鎔)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자유노동조합의 취지를 게재 반포하여 국가 통치의 기본 제도를 파괴하고 노동자 본위의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시킬 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 고취하였다"는 명목으로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4년 4월 만기 출옥하였다.

1924년 7월 오르그뷰로 국내 위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성(李成)과 접촉하였다. 같은 해 8월 9일 대구청년회 주최로 열린 사회문제경연회에 최창익(崔昌益)과 함께 경연자로 참여하였고, 10월에 『 시대일보(時代日報)』 기자가 되었으며, 이때를 전후로 화요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10월 8일 서울청년회 4주년 기념회에 참여하여 ‘우리는 반제국주의 운동의 선봉이 되자!’ 등의 표어가 문제가 되어 종로경찰서 경관에 의해 해산되던 와중에 이성태(李星泰), 신백우 등과 함께 검속되기도 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말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어 1931년 2월 19일에 만기 출감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학생운동 격문 배포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 10월 30일에는 만주에서 어려움을 겪는 조선인 동포를 위한 금품 및 기부금 모집, 조사원 파견, 추도회 개최를 협의한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滿洲遭難同胞問題協議會)에 참여하기도 하엿다.

1932년 잡지 『 신계단』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천도교청년당 대표인 조기간(趙基栞)의 「조선운동과 영도문제」를 비판하는 글이 『신계단』 11월호에 기자 남만희(南萬熙)의 「광상(狂想), 광무(狂舞), 혼예(昏例) 천도교행진곡의 일절」로 게재되자, 이것이 빌미가 되어 11월 19일 조선지광사 편질실에서 천도교청년당 당원들에게 폭행을 당하였다. 이 사건 직후 『동아일보』를 통해 기사의 내용은 정당했다고 강변하면서 1932년 12월 ‘천도교정체비판폭로회’ 결성대회에 주축으로 참여하여 반천도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8 · 15광복 직후 조선민족당 발기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한국민주당 조사부 부장이 되었다. 1946년 5월 한국민주당 사회문제대책 분과위원회 위원, 같은 해 10월 한국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 12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1월에는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1949년 8월 31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및 저술

1919년경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리카도의 『경제학』, 멜서스의 『인구론』, 일본의 사회주의자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와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저작,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경제학 및 사회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20년 10월에 나온 『공제』 2호에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찰」을 발표하면서 노동 문제는 사회주의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주-소작인 관계를 노동자-자본가 관계로 등치시켜 소작운동을 농촌의 노동운동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같은 호에 유무아(兪無我)라는 필명으로 「희곡 온정주의(溫情主義)」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왜정시대인물사료(倭政時代人物史料)』

단행본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청계연구소, 1986)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Ⅰ(아세아문제연구소, 1979)

논문

최보민, 「1930년대 초반 반천도교운동에 나타난 사회주의 그룹의 활동과 인식」(『역사연구』 34, 2018)
최선웅, 「1920년대 초 한국공산주의운동의 탈자유주의화 과정」(『한국사학보』 26, 고려사학회, 2007)
박철하, 「북풍파 공산주의 그룹의 형성」(『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1998)
전명혁,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운동 연구」(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7)

신문 · 잡지

『공제』
『동아일보』
『신계단』
『신생활』
『조선일보』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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