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경 ()

언론·방송
인물
일제강점기 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자로 입사한 언론인. 기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7년
사망 연도
미상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자로 입사한 언론인. 기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3년 한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사범과에 진학하여 1915년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각경과 함께 1913년에 한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제3회 졸업생 가운데는 소설가 이광수의 아내 허영숙(許英肅), 최남선의 여동생 최설경(崔雪卿)도 있었다. 졸업 후 동경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귀국한 뒤 교육계에서 2년 동안 종사하였다.

1920년 7월『매일신보』에서 여기자(부인기자)를 모집했을 때 응모하여 이각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 선발되었다. 『매일신보』에서 여기자를 채용한 것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지 3개월 후였다. 『매일신보』는 이전까지 유일한 한국어신문으로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으나 민간지가 나타나자 이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편집국의 기구를 개편하고 다른 신문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기 위해 여기자를 모집한 것이다.

이리하여 1920년 9월 5일자 『매일신보』에는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의 부인사회를 위하야 건전한 붓을 휘두를 그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자랑스럽게 이각경의 입사를 알렸다. 같은 지면에 이각경은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여자를 너무 멸시하고 무시하여 여자는 다만 남자의 종속적 물건으로 절대 복종하고 절대 무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신문사업에 나선 것은 참으로 그 책임이 무겁다는 내용의 ‘입사의 변’을 실었다.

그는 열흘 뒤인 9월 14일자에 ‘부인기자의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창덕궁 지밀여관(至密女官)을 방문한 기사를 실었고, 이어서 9월 15일자부터는 4회에 걸쳐 고정제목으로 ‘부인기자의 가정방문기’를 게재하였으며, 이 해 12월 5일자에는 <이백작저(李伯爵邸) 방문기>를 썼다.

이어서 1921년 1월 1일자에는 ‘본사기자 이각경 여사’라고 이름을 크게 밝힌 기명 기사로 <신년 벽두를 제하야 조선 가정의 주부께>라는 1면을 모두 차지한 장문의 계몽적인 논설을 실었다. 이 논설에서 “우리 조선은 날과 달로 변하여가는 이 시대를 당하여 지난 시대의 범절만 지킬 수도 없고 또 나날이 달라가는 풍조를 다 숭상할 수도 없다.”고 전제하고 여성계의 개량은 전통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가면서 고칠 것은 고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각경은 이 때부터 여성을 위한 계몽적인 기사를 여러 편 실었다. 그러나 이각경의 기자생활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부인기자’의 기사는 이 해 후반기부터는 게재되지 않았으며 이각경의 활동에 관해서도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참고문헌

『한국언론인물사화』(정진석, 대한언론인회, 1992)
집필자
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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