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경(漢卿), 호는 성석(醒石). 경상북도 금릉(지금의 경상북도 김천) 출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복수 상소를 3회나 올렸고, 1896년 황제폐위 음모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던 안경수(安駉壽) 등이 귀국하였을 때 그들의 처단을 청원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97년에는 소두(疏頭)가 되어 다시 상소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궁내부주사로 자강지책을 청하는 연명소를 올렸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석종(李奭鍾)·조재명(趙載明) 등과 13도유약소(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6차례에 걸쳐 토역·항일·복권에 관한 소를 올렸다.
또한, 서북청년(西北靑年) 수십명을 규합하여 박제순(朴齊純)·조중응(趙重應) 등을 주살하려다가 일본헌병에 붙잡혀 복역 중 단식으로 순사하자, 일제는 시체를 남대문 밖에 유기하였다. 아들에게 남긴 유서는 국적(國賊)을 참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죽음보다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슬퍼하라는 내용이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