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백(源伯), 호는 양은(陽隱). 충청남도 논산 출신. 경술국치 때 순절한 이학순(李學純)의 아들이다.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저항해 여러 차례 민적(民籍)을 불살랐으며, 이로 인해 1913년 연산경찰서와 대전경찰서에 각각 몇 개월간 구금되었다.
1916년 7월 연산 한양리 본가에서 홍주의병장 이용규(李容珪)·이만직(李晩稙)·윤병일(尹炳日), 동생 이내준(李來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각자 토지와 가옥을 팔아 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밀정 박동신(朴東臣)의 고발로 다음 해 4월 모의 장소인 논산의 한 여관에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전라남도 기자도(箕子島)로 1년간 유배되었다.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같은 날 이용규·유근(柳瑾)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1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1919년 6월에는 김복한(金福漢)·곽종석(郭鍾錫)·전양진(田良鎭) 등과 유림 대표 1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상해임시정부를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가 경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광주감옥에 1개월간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는 논산에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 방법 등을 모의하다 독립단의 두목으로 붙잡혔다. 1923년 강도 혐의로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다시 6개월로 감형되어 복역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