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출신. 중추원의관 이기영(李琪榮)의 아들이다.
1906년 4월 박이환(朴駬桓) · 문형모(文亨謨)와 더불어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을 만나 의병 활동에 동참할 것을 맹약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의병 200여 명을 모은 뒤 총기 300여 자루와 탄환 등을 준비하였다. 1907년 11월 257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고산 · 진안 · 장수 · 용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1908년 초까지 왜병 100여 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규홍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용담 주자천(朱子川: 지금의 朱川)에서 1908년 새해를 맞고, 정월 초하루부터 초사흘에 이르기까지 진산 · 금산 등지를 계속 행군하며 왜군과 접전, 왜병 56명을 죽였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창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7년 10월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협력하다가, 1920년 3월 항일운동의 무대를 만주로 옮겨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였다.
그 해 6월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4개월 동안 고문을 받은 뒤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