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윤 ()

의약학
인물
조선후기 광흥창봉사를 역임한 의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광흥창봉사
목차
정의
조선후기 광흥창봉사를 역임한 의관.
생애 및 활동사항

1713년(숙종 39) 그의 의술이 자못 신기하다는 소문이 나자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의 추천으로 양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그를 말을 보내어 불러들였다. 경종 때에는 도인승기탕(桃仁承氣湯)·구선남극단(癯仙南極丹) 등의 약을 여러 차례 지어 올렸는데 이들 약은 독성이 강하였다.

1724년(경종 4) 광흥창봉사로 있으면서, 왕의 병환으로 임시 설치한 의약청(議藥廳)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진찰시에 여러 번 불참하거나 지각을 하였으며 성품이 경거망동하고 불성실하였으므로 벼슬을 삭탈당할 뻔하였다.

경종이 죽을 때에도 여러 의원들과 함께 의약청에서 어떠한 약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논의하였으나 다른 의원들과 의견 대립이 잦았다. 결국 영조 즉위 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집필자
김쾌정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