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산인(雨溪散人). 사간원사간 이의무(李宜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행(李荇)이다. 아버지는 도사 이원상(李元祥)이며, 어머니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신옥형(申玉衡)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생원이 되고, 1574년(선조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권지성균관학유 · 의정부사록을 거쳐 1577년 예문관검열이 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그 뒤 평안병마평사 · 성균관전적 · 병조좌랑 · 정언 · 형조좌랑 등을 거쳐 1582년 예조정랑 · 지평, 이듬해 성균관직강 · 북청판관 · 함경도도사를 지냈다.
1584년 병조정랑 · 장악원첨정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북도민의 구호 현황을 살피고 돌아와 영흥부사가 되었다. 1586년 길주목사로 나갔다가 함경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승진했고, 1589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해 겨울 모역한 정여립(鄭汝立)의 문생과 그 도당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영을 어기고, 혐의가 적은 인물을 임의로 용서해 풀어주었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591년 호조참판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곧 지중추부사로서 전라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로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 김수(金晬)와 함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해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5월에 최원(崔遠)에게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복(李慶福)을 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해 임천(林川)을 거쳐 전진하였다.
그러나 도중 용인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실패하자 다시 전라도로 돌아왔다. 그 뒤 일본군이 전주 · 금산 지역을 침입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도절제사로 삼아 웅치(熊峙)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주에 육박한 일본군을 그 고을 선비 이정란(李廷鸞)과 함께 격퇴시켰다.
같은 해 가을 용인 패전의 책임자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뒤, 의금부에 감금되어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94년(선조 27)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우계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