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있을 때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때 함께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치부하였으나 홀로 청고한 생활을 하였다.
또 충선왕이 티베트[吐蕃]에 귀양을 가게 되자 역졸을 시켜 금을 바치고 왕과 호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하였다. 1325년(충숙 12) 7월 밀직부사로 충선왕의 자궁(梓宮: 유해를 모신 관)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그 이듬해 7월 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두려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김이(金怡)·전영보(全英甫) 등과 함께 원제(元帝)에게 주청하여 중지하게 함으로써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28년 12월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있을 때 원에 가서 문종의 즉위와 개원(開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330년(충혜 즉위) 4월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10월 사신으로 원에 다녀왔으며, 1341년(충혜 복위 2) 9월 정승에 올랐다.
그 이듬해 3월 정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해 조적(曺頔)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에 책록되고 철권(鐵券)이 하사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351년 12월 공민왕이 즉위하자 또 영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정승 영도첨의사(左政丞領都僉議事)에 올랐으며,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한 후 1357년(공민 6) 7월 세상을 떠났다.
충선왕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일찍이 왕의 총희(寵姬)를 백문거(白文擧)와 함께 한 사람씩 물려받았으나 별실에 두고 한번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의롭게 여겼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