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4년(성종 15)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한 뒤로 학문이 크게 성취되어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등과는 동문수학한 관계이다. 1489년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는데, 언론이 정중하고 의기(義氣)가 준엄해 동료들의 많은 추앙을 받았다.
1490년 성종이 병환에 있을 때 대비가 무당을 시켜 성균관 벽송정(碧松亭)에 음사를 설치하고 굿을 하자 유생들과 함께 제단을 부수고 무당을 쫓아내니, 대비가 대노해 성종에게 고했으나, 얼마 뒤 성종은 유생들을 처벌하지 않고 성균관 대사성을 불러 “그대가 학생들을 인도해 사습(士習)을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노라.”고 하며 어주(御酒)까지 하사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496년 영안남도(永安南道: 지금의 함경남도) 병마평사(兵馬評事)를 거쳐 다음 해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훈구파의 모함으로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연루되어 김굉필 · 정여창 · 김일손(金馹孫) ·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신원되었다.
절의(節義)에 투철하고 시부(詩賦)에 능하였다. 특히 「다부(茶賦)」를 지어 차의 미묘한 미각이 주는 오공(五功) · 육덕(六德)을 설파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한재문집(寒齋文集)』 · 『이평사집(李評事集)』이 있다.
1552년(명종 7) 이조참판, 1707년(숙종 33)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의 황강서원(黃崗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