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선조 36) 진사에 오르고, 1608년(광해군 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전적 · 감찰을 거친 후 예조 · 병조 · 형조의 좌랑, 부교리 · 헌납 · 병조정랑 ·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내, 삼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있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했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해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1614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거쳐 1616년 영평판관(永平判官)이 되어 포천도 함께 다스렸다.
이 때 이항복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무고당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해가 심한 정치를 일신시키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 · 부승지 · 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이조참의로서 왕세자를 전주로 호종하고,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이듬 해 전라감사에 부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 · 좌승지 · 도승지 · 병조참판 · 대사헌 · 형조참판 · 경기감사 등을 지냈으며, 1636년 형조판서 · 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와 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하였으며,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고, 1640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명나라를 칠 원군을 보낼 수 없음을 전하고 왔다.
164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승지 홍무적(洪茂績)의 모함으로 사직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지어 소요하며 지냈고, 향인(鄕人)을 권장해 「서호향약기(西湖鄕約記)」라는 향약을 만들기도 하였다.
다시 영중추부사에 서용되었으나 나오지 않고 강호에 살다 죽으니, 인조가 조회를 폐하고 조제(弔祭)했다 한다. 이시백(李時白)은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이성구의 인물됨이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저서로 『분사집(分沙集)』이 있었음을 이익(李瀷)이 작성한 「분사집서(分沙集序)」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현재는 그 전하는 바를 찾아보기 어렵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