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숭녕은 해방 이후 『고어의 음운과 문법』, 『국어학논총』, 『혁신국어학사』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908년에 태어나 1994년에 사망하였으며 호는 심악이다. 1933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졸업 논문은「조선어의 Hiatus현상 고찰」이다. 1935년에 진단학회에 입회하고 그 해에 「어명잡고」를 『진단학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학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숭녕은 과학적 기반으로 한 국어학의 탐구를 위해 고전을 많이 참고하였고, 전국의 방언을 샅샅이 채집하였다. 학회활동도 활발하였으며 논문 총수가 100여 편에 이를 정도로 일생을 학문연구에 바쳤다.
아명은 경록(景祿). 호는 경록(景祿), 심악(心岳). 서울 출생. 아버지는 규장각(奎章閣) 경연참찬관(經蓮參贊官) 원임비서승(原任秘書丞), 궁내부(宮內府) 기후관(祇候官)을 지낸 한학자 춘사(春沙) 병관(炳觀)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그리고 부친에게서 한시와 한문을 배웠다.
보인(輔仁)학교, 매동(梅洞)공립보통학교와 경성(京城)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해에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 문과에 입학하였고 1933년에 같은 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朝鮮語及文學科)를 졸업하였다. 언어학 교수였던 고바야시 시데오(小林英夫)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영 · 독 · 불어에 능통하였고, 졸업논문은 「조선어의 Hiatus현상 고찰」이다.
재학 시절에는 조윤제(趙潤濟) · 이희승(李熙昇) 등의 동문들이 조직한 조선어문학회에 가입하여 『조선어문학회보(朝鮮語文學會報)』에 그를 아꼈던 조윤제의 권유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졸업한 해에 작고한 김재철(金在喆)의 후임으로 평양사범학교의 교유(敎諭)로 취임하여 광복까지 근무하였다.
1935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에 입회하고 그 해에 「어명잡고(魚名雜攷)」를 『진단학보(震檀學報)』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학술활동을 시작하였다. 1939년에는 이 학회의 위원에 피선되어 더욱 활발히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ᄋᆞ음고(音攷)」(제12호, 1940)는 현대국어학 특히 음운사 연구의 디딤돌이 된 본격적인 현대식 논문이었다.
광복과 더불어 상경하여 진단학회 재창립에 참여하였고 경성대학 예과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학제개편으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및 대학원장,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및 국학연구원장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및 대학원장, 백제문화개발연구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54년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에 피선되어 작고할 때까지(1981년 이후로는 원로회원) 계속되었다.
건강을 위하여 등산을 즐겼던 그는 1948년에 한국산악회 이사에 피선, 1959년에는 부회장에 그리고 1985년에는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1962년에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그리고 1968년에는 한국직장산악인협회장에 피선되었다. 1979년에는 자연보호중앙협의회(自然保護中央協議會) 위원장에도 추대되었다. 또한 연안이씨전국대종회(延安李氏全國大宗會) 회장과 한국천주교 서울교구 평신도사도직(平信徒使徒職) 협의회 부회장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학회활동도 활발하였는바, 1939년 이래 진단학회(震檀學會) 위원 · 상무위원 · 간사 · 평의원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고 1965년부터는 국어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74년에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부회장에 그리고 1992년에 명예회장에 추대되었으며, 1980년에는 한국언어학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학회활동과 관련되어 논문 발표도 『진단학보(震檀學報)』, 『한글』, 『학술원논문집(學術院論文集)』, 『서울대학교논문집』 등에 집중되었는데, 논문 총수가 100여 편에 이를 정도로 일생을 학문연구에 바쳤다.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조선어 이화작용(異化作用)에 대하여」(1939), 「 · 음고(音攷)」(1940), 「모음조화 수정론」(1946), 「조선어의 히아투스(Hiatus)와 자음발달에 대하여」(1947), 「모음조화연구」(1949), 「순음고(脣音攷)」(1954), 「15세기의 모음체계와 이중모음의 Kontraktion적 발달에 대하여」(1954), 「신라시대의 표기법체계에 관한 시론」(1955), 「‘ㅿ'음고」(1956), 「’ · '음고 재론」(1959), 「15세기의 활용에서의 성조(聲調)의 고찰」(1964), 「/ · /음의 소실기(消失期) 추정에 대하여」(1977) 등의 음운론 관련의 것들이 있다.
또한 「격(格)의 독립품사 시비」(1953), 「이두(吏讀)의 ‘殷’, ‘矣’ 고-처격의 비교시도」(1953), 「접미사 -b(p)-계의 연구」(1955), 「접미사 ‘-k(ŋ), -ŋ’에 대하여」(1956), 「taβi, tahi고」(1956), 「국어조어론시고」(1957), 「어간쌍형설의 제기」(1957), 「어간형성과 활용어미에서의 ‘-(오/우)-’의 개재에 대하여」(1959), 「Volitive form으로서의 Prefinal ending ‘-(o/u)-’의 개재에 대하여」(1960), 「‘샷다’고」(1961), 「겸양법연구」(1962), 「중세국어의 MOOD론」(1964), 「경어법연구」(1964), 「15세기 국어에서의 ‘-는’계 조사의 기능에 대하여」(1966), 「주격중출의 문장구조에 대하여」(1969), 「15세기 국어의 관형사형/-논/계 어미에 대하여」(1976), 「15세기 국어의 복수성 부여의 ‘-ᄃᆞᆯ’에 대하여」(1980), 「국어의 인대명사와 신분성지배에 대하여」(1983) · 「‘옷고ᄉᆞᆫ’고」(1985) 등의 문법론 관련의 것들이 있다.
「어명잡고」(1935) · 「한일양어의 어휘비교 시고」(1955), 「‘ᄒᆞᄫᆞᅀᅡ’고」(1959), 「시가에 나타난 식물명의 어휘론적 연구」(1966), 「어휘사」(1967), 「중세국어의 가족호칭에 대하여」(1968), 「‘ᄠᅳᆮ’의 다의고」(1975), 「제주도 감귤고」(1979), 「이조초기 어류에 관한 어휘론적 고찰」(1984), 「‘말’과 ‘말ᄊᆞᆷ’의 의미식별에 대하여」(1986) 등은 어휘론 관련의 것들이 있다.
그리고 「국어학사」(1956), 「세종의 언어정책에 관한 연구」(1958), 「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연구」」(1959), 「황윤석(黃允錫)의 ‘이수신편(理藪新編)’의 고찰」(1964), 「최만리(崔萬理) 연구」(1964), 「최세진(崔世珍) 연구」(1965), 「신미(信眉)의 독경사업(譯經事業)에 관한 연구」(1986) 등의 국어학사와 관련된 많은 논문이 있다.
이와 더불어 「덕적군도(德積群島)의 방언 연구」(1950), 「제주도방언의 형태론적 연구」(1957), 「한국방언사」(1967) 등의 방언 관련과 「허난설헌의 연구」(1929), 「연산군의 시상(詩想)의 고찰」(1971), 「성호(星湖)의 북한산 기행문의 고찰」(1973) 등 문학 관련의 것들이 있다.
저서로는 『고어의 음운과 문법』(1949), 『조선어음운론연구 제1집 / · /음고』(1949), 『국어학개설』(1954), 『중세국어문법』(1961), 『혁신국어학사』(1976)가 있으며, 이외에 논문집으로 『음운론 연구』(1955), 『국어학논고』(1960), 『국어조어론고』(1961), 『국어학논총』(1966),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1981),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1985) 등이 있고, 『대학가의 파수병』(1968), 『산길을 걷노라면』(1971), 『산 좋아 산을 타니』(1978)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문법 고전 관계의 중등교육용 교과서들도 여럿 있다. 『신국어학사』와 『조어론연구』는 유고로 남아 있다. 국어학 이외의 논문 저서는 그의 생활과 관련된 것이었다.
한평생 과학적 기반 위에 새로운 국어학을 건설하려는 일념으로 고전을 두루 상고하였고, 전국의 방언을 샅샅이 채집하였으며, 일반언어학의 이론도 널리 살폈다. 작고하기 전의 수년간의 병환기간을 제외하고는 80세가 넘도록 계속 집필하여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