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연작시. 외국의 풍물과 역사를 칠언절구로 노래하고 간략히 주석을 달아두었다. ≪임하필기 林下筆記≫ 권39에 수록되어 있다. <이역죽지사>는 조수삼(趙秀三)의 <외이죽지사 外夷竹枝詞>와 함께 청나라 우동(尤侗)의 <외국죽지사 外國竹枝詞>로부터 영향을 받아 소재나 양식이 같다.
외국 사정이 더 구체적으로 알려진 시기에 창작되어 내용이 더욱 실제적이다. 우동은 ≪황명악부 皇明樂府≫(擬明史樂府) 100수를 지었다. 그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 연작 단형시를 통해서 영사(詠史)를 하는 방법이 널리 이용되었다. 한말 박규수(朴珪壽)의 <봉소여향절구일백수 鳳韶餘響絶句一百首>는 그 일례이다.
조선 후기에 해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공간인식이 확대되었다.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시가에 반영된 결과로 외국의 사정을 죽지사체를 이용하여 노래한 작품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역죽지사>의 서문에서 이유원은 “청의 ≪직공도 職貢圖≫는 외국의 인물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 책은 건륭(乾隆) 때에 편집된 것이다. 해외의 이인(夷人)이 당시에 직공(職貢)한 것은 ≪해국도지 海國圖志≫의 수(數)와 다르다. 하지만 ≪직공도≫에 기록된 것에 따라서 기록하여 둔다.”고 하였다.
<이역죽지사>에서 시가로 노래한 외국은 유구(琉球)·안남(安南)·섬라(暹羅)·소록(蘇錄)·남장(南掌)·면전(緬甸)·대서양(大西洋)·함륵미제아성(合勒未祭亞省)·옹가리아(翁加里亞)·파라니아(波羅泥亞)·홍흑귀노(洪黑鬼奴)·양승니(洋僧尼)·소서양국(小西洋國)·영길리(英吉利)·법란서(法蘭西)·서국(瑞國)·일본(日本)·마진(馬辰)·문채(汶菜)·유불(柔佛)·하란(荷蘭)·아라사(俄羅斯)·송거로(宋腒朥)·동포채(東埔寨)·여송(呂宋)·가랄파(咖喇吧)·마육갑(嗎六甲)·소자(蘇喇)·아리만(亞利晩)·서장제번(西藏諸番) 등이다.
<이역죽지사>에서 일본을 노래한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왜노(倭奴)가 당(唐)나라 때에 들어와 일본이 되었지. 무(巫)를 믿고 불교를 숭상하며 성격이 방정맞다. 그들이 이 세상에 붙어사는 것은 새털 하나보다 가벼워, 칼 하나 몸에 차고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어디고 간다(古昔倭奴唐日本 信巫崇釋性佻狼 此生如寄輕鴻毛 一劒隨身無邇遠).”
<이역죽지사>의 시 가운데는 불합리한 내용도 있다. 그러나 <양승니>에서 서양에는 교화(敎化)와 치세(治世)의 두 왕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점은 제정(祭政)이 분리되어 법황이 존재하였던 서양의 사정을 올바로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 제국주의의 발흥에 대한 경계심은 드러나지 않는다. 기이(奇異) 사실을 기록한다는 의도가 더욱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