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 ()

회령 오국성 성벽
회령 오국성 성벽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회령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평안도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53년(단종 1)
본관
양산(梁山)
주요 관직
사복소윤|절제사|회령절제사|평안도도절제사
관련 사건
계유정란|이징옥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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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전기 회령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평안도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양산(梁山). 호는 원봉(圓峯). 아버지는 지중추원사 이전생(李全生)이며, 이징석(李澄石)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순직하고 무용이 뛰어났다. 어머니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다고 하자 형 이징석과 같이 사냥을 나갔다. 이징석은 그날로 멧돼지를 활로 쏘아 죽여서 잡아왔지만 이징옥은 이틀이나 힘들게 몰이를 해서 기진맥진한 멧돼지를 산 채로 끌고 왔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징석과는 성격이 대조적임을 잘 보여준다.

갑사(甲士)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1416년(태종 16) 부사직으로 무과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복소윤(司僕少尹)에 제수되었다. 1423년(세종 5) 황상(黃象)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고,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이 때부터 1430년까지 여진이 침입하여 노략질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공을 크게 세우자, 세종이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얼마 동안 고향인 양산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다가 143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를 거쳐 1436년 회령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판경흥도호부사로 전직하면서 함길도도절제사인 김종서(金宗瑞)와 같이 4진의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2년만에 방위와 경영의 포치(布置)를 완성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해 조선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그는 동북 변경의 개척 초창기에 제일선에 배치되어 야인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1435년을 고비로 4진이 안정되면서부터 대여진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져 1438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함경도를 떠났다. 그 뒤 100일 만에 기복되어 다시 경상도 · 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맡았다.

1449년 20여 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 · 회유 · 복속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야선(也先)의 침입에 대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 10년 만에 다시 북방의 방위에 임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계유정난을 일으켜 집권한 뒤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하자, 후임자인 박호문(朴好問)을 죽인 뒤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서 밤을 새울 때 종성판관 정종(鄭鐘) · 이행검(李行儉) 등의 습격을 받아 아들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 난은 1402년 11월의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서, 후일 이시애(李施愛)의 난의 선구가 되었다. 특히, 사대사상에 젖었던 당시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칭한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지퇴당집(知退堂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천해정속고(天海亭續稿)』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기문(大東奇聞)』
「이징옥(李澄玉)과 육진(六鎭)」(김성준, 『사총』 12·13, 1968)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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