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7년(선조 즉위년)에 태어나 1648년(인조 26)에 죽었다. 본관은 농서(隴西)이다. 증조부는 병조 판서를 지낸 이자상(李自商)이고, 형은 이광후(李光後)이다.
1592년 4월 19일 일본 제3군 구로다 나가유키〔黑田長政〕와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이끄는 1만 1000명의 일본군이 김해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김해와 창원을 연이어 함락시키고 북상하였다. 일본군은 칠원(漆原) - 영산(靈山) - 창녕(昌寧) – 현풍(玄風)을 거쳐 대구의 서쪽 성주(星州)까지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성일(金誠一)을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하였다. 김성일의 초유 활동으로 경상우도에서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창후는 17세에 임진왜란을 경험하였다.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던 그는 일본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형 이광후와 함께 곽재우의 막하에 합류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 활동으로 경상우도에도 곳곳에서 의병 창의가 이어졌다. 의병장들 중에는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 부대에 합세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곽재우는 효율적인 의병 활동을 위해 군사 업무를 분장하였다.
이창후는 형 이광후와 함께 곽재우의 막하에서 전후 8년 동안 정진(鼎津)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참여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현풍 석문산성에 주둔하였던 경상좌도 방어사 곽재우는 조정의 청야책에 따라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다. 이창후는 곽재우를 따라 화왕산성에 들어갔다. 이창후는 모친의 상사를 당한 후 3년 동안 읍혈(泣血)하니 향리의 사람들이 효자라 감동하여 관가에 알리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이창후는 이를 중지시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경상도 자인의 상덕사(尙德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