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처눌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에 대구 지역 의병장으로, 전란 후 대구 지역 재건과 연경서원 복설을 주도한 학자.
이칭
기도(幾道)
모당(慕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3년(명종 8)
사망 연도
1634년(인조 12)
본관
일직(一直)
출생지
대구광역시
내용 요약

손처눌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에 대구 지역 의병장으로, 전란 후 대구 지역 재건과 연경서원 복설을 주도한 학자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친을 모시고 팔공산으로 피란하였고, 동생 손처약과 의병 창의를 맹세하였다. 이후 손처눌은 정사철·서사원 등과 창의하여 대구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에 대구 지역 의병장으로, 전란 후 대구 지역 재건과 연경서원 복설을 주도한 학자.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1553년(명종 8) 대구부(大丘府) 수성리(壽城里)에서 태어났다. 1567년(명종 22) 15세에 향시(鄕試)에 입격하였다.
1569년(선조 2)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의 딸인 광주이씨와 혼인하였다. 1587년(선조 20) 부인 이씨가 죽자, 이듬해 하성조씨(夏城曺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주요 활동

1570년(선조 3) 18세에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을 모시고 팔공산 파계사(巴溪寺)에서 글을 읽었다. 1571년(선조 4) 19세에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처음 만났다. 1572년(선조 5)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해 10월 동생 오매(五梅) 손처약(孫處約)과 함께 팔공산에 들어가 글을 읽었다. 1573년(선조 6) 향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감찰 김자용(金宇容)과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등과 교유하면서 경학심학을 심화시켜 나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손처눌은 양친을 모시고 최정산(最頂山)으로 피란하였다. 5월 행재소에서 주1가 있자, 동생 손처약과 창의할 것을 맹서하였다. 5월 28일 팔공산으로 피난을 온 대구 지역의 인사들은 팔공산 부인사(夫仁寺)에서 회합을 하고 주2를 발의하였다. 6월 손처눌은 임하 정사철, 낙재 서사원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7월 6일에 대구 지역의 인사들은 의병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손처눌은 공산의진군의 수성현 대장을 맡았다. 그는 대구 파잠의 협곡에 복병을 설치하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2월과 1594년(선조 27)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군무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1597년(선조 30) 손처눌은 양친의 상을 모두 마치고 다시 군무를 보았다. 그해 9월 일본군이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침입하자, 복병과 기물로 일본군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손처눌과 서사원 등은 1605년(선조 38) 대구 전역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통강을 실시하였고, 사당을 건립하여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손처눌은 연경서원의 사당 건립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자, 한강 정구에게 문의하였다. 손처눌의 문의에 따라 정구는 서원의 뒤쪽 언덕에 올라 위치를 선정해 주었다. 1620년(광해군 12) 한강 정구가 타계하자, 1622년 3월 연경서원에 정구를 주3하였다. 이때 손처눌은 퇴계에게 고한 주4과 봉안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손처눌은 전란으로 소실된 연경서원을 주5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학문과 저술

1843년(헌종 9) 서사원의 후손 서택렬(徐宅烈)이 편집 · 간행한 『 낙재문집(樂齋文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34년(인조 12)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모당선생문집(慕堂先生文集)』

단행본

구본욱 , 「연경서원(硏經書院)의 설립과 위상 및 의의」(『한국서원학보』 25, 한국서원학회, 2020)
구본욱 , 「대구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조선사연구』 24, 조선사연구회, 2015)
주석
주1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닌다.    우리말샘

주2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    우리말샘

주3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우리말샘

주4

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글.    우리말샘

주5

없앴던 것을 도로 설치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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