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선조 21)에 정린은 사촌 형 정춘(丁春), 조카 정대수(丁大水)와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린은 형 정철, 재종 형제 정춘, 조카 정대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막하로 들어갔다. 정린은 무과 동년의 일가 3인과 사촌 형 정철과 함께 전라 좌수영에 자원종군하여 초기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정철은 우위장(右衛將)이 되어 녹도만호 정운(鄭運), 송희립(宋希立) 등과 함께 책임을 부여받고 진군하였다. 정철과 정린은 당항포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 전공으로 정철은 초계 군수에 제수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진주에 남아 있던 일본군이 사방으로 흩어져 백성들이 유망하게 되자, 이순신은 정철을 별장으로 삼았다.
정린은 형 정철과 함께 진주 전장에서 사력을 다해 싸워 전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에 부산포 해전에서 형 정철은 전후장(殿後將)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포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린은 아들 정언신(丁彦愼)과 함께 형의 시신을 수습해 본선(本船)에 안치한 후, 형의 복수를 위해 혼자 작은 배를 이끌고 집접 적진에 돌진하였다. 그는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일본군을 무찔렀다.
아들 정언신은 부상당한 아버지를 보호하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얼마 뒤 정린은 부산포 해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병세가 깊어져 사망하였다. 아들 정언신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적의 요새로 직접 뛰어들어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조정에서는 정린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하였다. 형 정철과 조카 정대수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847년(헌종 13)에 정철, 정린, 정춘, 정대수를 기리는 사충사(四忠祠)가 건립되었고, 1927년 정린의 후손들과 충무공 이순신의 본손들이 합의하여 웅천동 송현마을에 이순신을 주향으로 하고 정씨사충을 배항하는 오충사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