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년(선조 12) 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8년(선조 21)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평부사로 있었는데, 적을 막지 않고 도주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593년(선조 26) 평해군수로 전임되었고,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과 용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모친상을 당하여 복상(服喪)하던 중 기복(起復)하여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좌영장을 겸직하면서 나주 인근 바다에 접한 9읍의 병사들을 관할하였다. 남유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노량 앞바다에 영조 · 정조대의 문신 서명선이 쓴 노량 전적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가 파괴하였고, 1987년 충청남남도 당진 충장사에 복원하였다. 충장사는 1667년(현종 7)에 건립되었다. 남유와 그의 아들 남이흥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1636년(인조 14) 남유와 남이흥에게 내린 남씨양세충신정려(南氏兩世忠臣旌閭)가 있다.
충장사 경내에 있는 남유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충청남도 기념물이다. 이 밖에도 아들 남이흥과 며느리 하동정씨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