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사 ()

불교
유적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 당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
이칭
이칭
부인사(夫人寺), 부인사(夫仁寺)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부인사(夫人寺)는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 당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末寺)이다. 창건 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선덕묘(善德廟)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의 소장처였던 부인사지(符仁寺址)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 당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동화사(桐華寺)의 말사(末寺)이다. 부인사(符印寺) 또는 부인사(夫人寺)라고도 일컬어진다. 부인사지는 1988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건립경위 및 역사적 변천

부인사는 개창 시기나 연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부인사 연기 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여왕이 친히 신라의 오악(五岳) 중에서 중악인 팔공산에 와서 기도하니 도인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어 국난을 물리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라 했다. 이에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립하고 이듬해 부인사를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또 옛날부터 선덕묘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퇴경당전서(退耕堂全書)』에는 신라 헌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였다. 불교가 번창하였던 신라와 고려시대 한때는 80여 동의 건물과 39개 암자(庵子)를 거느리고 약 2,000명 승려가 수도하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에 이르기까지 부인사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고려 『초조대장경』을 보유하였던 곳일 뿐만 아니라, 국내 유일 승시장(僧市場)이 개설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현재 일본 경도(京都)의 남선사(南禪寺)에 1,715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 반면에 고려 후기인 1203년(신종 6)에 무신 정권에 반대하는 부인사 승도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부인사라는 사찰 이름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비롯한 고려시대 문헌에는 ‘부인사(符仁寺)’로 쓰고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 등 기록에는 ‘부인사(夫人寺)’로 쓰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부인사(夫仁寺)’로 쓰고 있다.

이렇게 대찰이었던 부인사도 조선시대 억불(抑佛) 정책의 질곡을 벗어날 수 없었다. 1832년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1937년 『교남지(嶠南誌)』에는 ‘부인사’가 쇠퇴하여 ‘부인암(夫人庵)’으로 전락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부인사는 1930년대 초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원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 거리에 있는 암자 터에 중창(重創)했다. 원래 부인사 절터는 포도밭이 되었고, 현재 부인사에서 200m 남쪽에 당간지주가, 팔공산 순환도로 남쪽에 금당좌로 추정되는 유적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59년에 중건했다. 이후 1986년에 연성타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승려들만의 승시장이 섰다는 구전이 전하여지지만, 몽고의 침입 이후 중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중창(重創) 및 중수(重修)의 역사가 전래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 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한 것이다. 1991년 선덕묘를 선덕여왕숭모전으로 좀 더 크게 옮겨 지었고, 선덕여왕 진영을 새로 조성하였다.

내용

당우(堂宇)로는 석가모니불상아미타불상관세음보살상을 모신 대웅전, 선덕여왕의 영정을 모신 선덕여왕숭모전과 종각 · 누각(樓閣), 그리고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선덕여왕숭모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일부 남았던 것을 1930년대 초에 중건한 것이며, 음력 3월 보름에는 이곳에서 동네 유지들과 승려가 함께 모여 선덕제(善德祭)를 지내고 있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쌍탑을 비롯하여 1988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부인사 석등과 당간지주 · 석등대석(石燈臺石) · 배례석(拜禮石) · 마애여래 좌상 등이 있다. 최근까지 무너져 있었던 쌍탑 중 1988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부인사 서탑은 1966년에 복원하였으며, 신라 말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석탑 옆에는 50㎝ 가량의 머리 없는 석불이 있는데, 1978년까지는 여러 기가 있었으나 1979년에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2기의 석등이 있는데 1기는 가운데가 금이 갔으나 완전한 형태이고, 이보다 작은 석등은 밑받침만 남아 있다. 이 석등 앞에는 돌 사면에 높이 약 70㎝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 배례석이 있다.

절 부근의 포도밭 속에는 신라 때의 작품인 당간지주가 있어 전성기의 절 영역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고 조각한 마애여래 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마애불이다. 이밖에도 초석과 축대(築臺)에 남아 있는 화려한 장대석(長臺石)이 산재해 있다.

남선사 소장 초조대장경

1614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에 의하여 남선사(南禪寺)로 이관되었던 대장경은 본래 선창사(禪昌寺)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였다. 이 자료의 성립과 관련된 사람 중 선창사에 남아있는 강호 시대(江戶時代)의 기록에는 월암선사(月菴禪師)와 제자인 무견화상(無見和尙)이 둘 다 중국으로 건너가 대장경의 수집에 진력하였으나 완수하지 못하고 1393년 또는 1407에 현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창사의 창건에 관련된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대체로 1389년에 입적한 월암종광(月菴宗光)에 의하여 개산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14세기 후반의 시기로 추정되며 임제종(臨濟宗) 남선사는 교토 동산 가람(伽藍)의 일부로 그 시작은 1291년에 구산법황(亀山法皇)이 무관보문(無関普門) 선사를 맞이하면서 개창되었다.

남선사에 소장된 자료의 판본과 총수에 대하여 말송보화(末松保和)와 도엽암길(稻葉岩吉)이 1931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체 5,822권 중 간본(刊本)은 4,740권 사본(寫本)은 1,082권으로 이 중 고려 『초조대장경』은 1,715권이다.

고려 『초조대장경』은 국내 소장본은 300여 권에 불과해 1∼2권만 새로 발견되더라도 국보로 지정할 만한 가치를 지닌 유물이다. 초조대장경은 남선사와 일본 대마도 역사문화박물관이 6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등 국내보다 일본이 더 많은 분량을 갖고 있다. 남선사 서보전(瑞寶展)에 있는 일체경(一切經)은 원래 이 절 말사 중의 하나였던 기후현[岐阜縣] 선창사(禪昌寺)가 소장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권력이 재편되면서 일체경에 눈독을 들이는 권력자들이 생기자 선창사 승려들은 타 종단에 빼앗기는 것을 우려해 말사보다 본사가 소장해야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선창사 콘치니[金地院]와 수우덴[崇傳]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은 후 혼슈 지방 내륙에 있던 선창사에서 교토 남선사로 일체경을 이전했고 선창사와 남선사 기록에는 1614년 1월 26일 일체경을 배에 실어 교토 인근까지 옮긴 후 다시 수레를 이용해 육로로 옮겨 2월 5일 남선사에 일체경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선사로 옮겨지기 이전 일체경을 완성해 소장했던 선창사는 광엄천황(光嚴天皇, 1313∼1364)의 칙명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이 사찰 기록에 의하면 창건 당시 주지였던 월암선사의 제자 무견화상은 스승을 대신해 중국에 건너가 일체경을 모으다 1393년 또는 1407년쯤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 전해져 이 당시부터 중국과 한반도의 불경을 모으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남선사는 고려 『초조대장경』 판본을 가장 많이 소장한 사찰이었다. 남선사에서 『초조대장경』을 소장하게 것은 본래 14세기 후반에 건립된 선창사(禪昌寺)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이 1614년에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명에 의하여 본산인 남선사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장경은 14세기에 구주(九州) 박다(博多)의 경안(慶安)이 중국과 고려의 대장경을 수집하여 신호(神戶)의 선창사로 옮긴 것이었다. 선창사는 남선사에 대장경을 이관시킨 대가로 남선사 진승원으로부터 중국에 가서 대장경을 구하였던 월암선사의 의발과 구산 법황 불사리탑을 받았다고 한다.

남선사와 관련해서는 1448년(세종 30)에도 일본 사신 문계정우(文溪正祐)가 와서 남선사가 일본 제일의 선찰인데 화재로 법보(法寶)가 모두 불탔으니 대장경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남선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장경은 고려 『초조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은 해인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즉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을 만들기 전에 고려에서 처음 판각하였던 대장경을 말하였다. 1010년에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 조정이 부처의 힘으로 요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제작한 대장경이 바로 『초조대장경』이었다. 『초조대장경』 판각 사업은 왕실과 귀족의 지원에 힘입어 현종의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029년(현종 20)에 대장경 판각이 1차적으로 끝나고, 그 후 계속 경판이 보충되어 1087년(선종 4) 2월에 『초조대장경』이 모두 완성되었다. 이때의 『초조대장경』은 총 6,000여 권으로 『개보대장경』의 총 5,048권을 능가하였으며,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대장경이었다. 대장경판은 처음에 흥왕사 대장전에 보관하였지만, 거듭되는 북쪽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개경 근처에 보관하기는 불안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대장경판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팔공산 부인사에 옮겨 봉안하였다. 하지만 1232년(고종 19)의 몽골 침입으로 경판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강화도에 있던 고려 조정은 현종대에 부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쳤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여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으로 재조대장경을 판각하였다. 이것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이다.

초조대장경판은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지만, 그 대장경판으로 인출(印出)한 대장경의 일부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중 교토의 남선사에 가장 많은 대장경이 남아 있는데 총 1,876권의 초조대장경이 소장되었다. 그 밖에도 대마도에 617권이 보관되어 있고, 국내에 약 300권의 초조대장경이 전하고 있다.

남선사에서는 고려판 이외에도 여러 나라 판본을 수집하여 일체경을 이루었는데, 송판 370첩, 원판 2,305첩, 고려판(초조+재조) 1,748첩, 일본판 310첩, 사본 1,089첩으로 모두 5,822첩의 혼합장경을 구성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이고운, 박설산, 『명산고찰 따라』 (신문출판사, 1987)

논문

남권희, 「일본 남선사 소장 고려 초조대장경」 (『서지학연구>』 36, 2007)
남권희, 「남선사 초조대장경의 서지적 분석」 (『한국중세사연구』 28, 2010)
정동락, 「신라 고려시대 부인사의 변천과 현실대응」 (『민족문화논총』 39, 2008)
한기문, 「고려전기 부인사의 위상과 초조대장경판 소장 배경」 (『한국중세사연구』 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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