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익양(益陽: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 어려서 법률을 배웠으며 자라서는 의약에 정통하였다.
1108년(예종 3) 윤관(尹瓘)의 여진정벌이 계기가 되어 여진족이 웅주성(雄州城)을 공격하자, 비장으로서 2년 동안 성을 방비하던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적진을 뚫고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
며칠 뒤 아버지가 죽자 유해를 모시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개경에 돌아와 안장하였다. 1118년 송나라에서 의관을 파견하자 왕은 명가 자제를 뽑아 의술을 습득하게 하였는데, 이탄지도 선택되어 송나라 의술의 묘법을 터득하였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정부군의 약원(藥員)으로 수행하였다. 반란평정 후 논공행상에서 공적을 말하지 않아 하위에 머물렀으나,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늘 자제들에게 고향 은해사(銀海寺)에 가서 세상의 번잡함을 잊으며 살고 싶다고 하였다 한다. 1149년(의종 3) 조정의 명으로 대주(垈州: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에 부임하였으나, 병으로 인하여 은해사에 가서 일생을 마쳤다. 관직은 검교태의소감(檢校太醫少監)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