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이래 국왕이 죽으면 그 재위 기간을 단위로 당대사(當代史)를 편찬하였고 이를 실록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노산군(魯山君),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은 왕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 하였다. 즉 조선시대 실록청을 대신한 일기청이 설치되었던 것은 세 차례였다. 『노산군일기』의 편찬을 위해 일기청을 반드시 설치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노산군일기』는 숙종 때 『단종실록』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일기청 설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종실록』에 보인다. 1507년(중종2) 4월 『연산군일기』의 편찬을 위해 일기청을 설치하고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에 성희안(成希顔), 도청당상(都廳堂上)에 신용개(申用漑) · 김전(金詮), 그리고 김봉(金崶), 성세순(成世純), 성세명(成世明), 조계상(曺繼商) 등을 각방당상(各房堂上)에 임명하였다. 이때 일기청의 조직을 보면, 그 전대(前代)의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을 구성했던 예와 다름없었다. 『광해군일기』를 편찬할 때도 1624년(인조 2) 6월 일기청을 설치하고 총재관과 도청 및 각방의 당상 · 낭청을 임명하여, 그 해 7월부터 편찬에 착수하였다. 일기청의 활동은 실록청과 같았다.
한편, 『승정원일기』의 개수(改修)를 위해 설치되었던 일기청은 이와 달랐다. 조선 후기 『승정원일기』 개수 과정은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으로 알려진 『개수일기등록(改修日記謄錄)』과 『일기청개수등록(日記廳改修謄錄)』이 남아 있는데, 바로 『승정원일기』가 인재(人災)의 하나인 화재로 인해 소실된 뒤, 다시 소실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남은 자료이다.
『개수일기등록』은 1744년(영조20)에 창덕궁(昌德宮) 화재로 인해 불탄 『승정원일기』를 복원한 기록이다. 홍계희(洪啓禧)는 『승정원일기』에서 이괄의 난(李适의 亂)이 일어난 1624년(인조2) 이후의 일기는 완전하였는데 1744년에 불타 버렸고 경종(景宗) 임인년(1722,경종2) 이후의 일기만 완전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99년분의 일기가 불에 탔던 셈이다. 이로부터 이태 뒤인 영조 22년(1746)에 불탄 『승정원일기』를 개수하기로 결정했고, 그 개수 과정이 『개수일기등록』에 실려 있다. 일기청에서는 각사(各司)의 오래된 계초(啓草)와 상고할 만한 등록 가운데 1623년(인조1)부터 1721년(경종1)까지를 15일 안으로 본청으로 실어 보내도록 조치했다. 일기청추절목(日記廳追節目), 일기청교정절목(日記廳校正節目)을 만들어 운영했다.
『일기청개수등록』은 고종 27년(1890)에 있었던 개수 작업에 대한 기록이다. 『승정원일기』 3백여 권이 불탄 1851년부터 1888년까지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일성록』, 윤발, 『내각일력』, 『공거문총』 등이 이용되어서 그런지 다른 관청이나 서울과 지방의 민간에서 자료를 구하는 일은 없었다.
『개수일기등록』은 ‘일기청등록’(春秋館上 鼎足山城史庫上)이라는 표제로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고(奎12952), 『일기청개수등록』는 ‘일기청의궤(日記廳儀軌)’라는 이름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奎14205), 모두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일기청개수등록』을 ‘일기청의궤’라고 적은 것은 ‘의궤’와 ‘등록’에 대한 당시 용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나중에 붙인 명칭이라고 생각된다. 『개수일기등록』과 『일기청개수등록』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문서를 베껴 놓은 책자’이기도 하지만, 『승정원일기』의 개수 과정을 기록해 놓은 ‘종합 보고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는 자료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