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숙빈(叔賓). 임기(任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해원(任海元)이고, 아버지는 임섬(任暹)이며, 어머니는 송필훈(宋必勳)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62년 지평(持平)·정언(正言)을 지내면서 언로 개방을 요구하고,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장오(李章吾)가 군부대의 단속 소홀로 인한 대자보 사건을 성토하면서 그의 파직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767년 정언을 지내면서 언론의 중요성, 『어제유곤록(御製裕昆錄)』 : 난역(亂逆)의 원인을 설명한 책』의 불합리한 서술(敍述 : 난역의 근본이 斯文에 있고, 그 폐해가 홍수·맹수보다 심하다고 한 결론), 보상(輔相)의 잦은 교체, 도상(圖像)을 가져온 삼사신(三使臣) 파직, 제술(製述) 시험 때 성균관 유생을 모독한 도승지 송영중(宋瑩中) 파직, 중외 관원들의 비리 적발, 무장들의 권위 존중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 해 마음 씀씀이가 교묘하고 은밀하다 하여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775년 사간(司諫) 때에는 무과 수험생 중에서 시관(試官)을 모욕한 자에 대해서 엄한 형벌과 유배 조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 집의(集義)에 재직하면서 토역(討逆), 성균관의 개방, 과장(科場)에서의 부정 행위 방지, 궁방(宮房) 시장(柴場 : 뗄감을 마련할 수 있는 땅) 혁파, 북도(北道) 흉황(凶荒)과 관련한 함경감사 조중회(趙重晦) 파직 등의 일을 처리해 주도록 청하였다. 또 관리의 잦은 교체를 비판하고, 각 군문의 개인 주택을 수용, 철거하는 행동을 시정시켜 줄 것을 주장하였다.
1782년에 대사헌 김이소(金履素)의 주청에 따라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1784년에 남해(南海)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1801년(순조 1) 복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