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임치(林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기(林夔)이고, 아버지는 임도헌(林道憲)이며, 어머니는 권경(權冏)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6년에는 장령(掌令)을 지냈다.
1778년(정조 2)에 인천(仁川) 안핵어사(按覈御史)로 파견되었으나, 이유경(李儒慶)·유한익(劉漢翼)의 산에 대한 송사 처리를 잘못하여 파직되었다. 1780년에는 교리(校理)에 재직하다가 영남 지방의 안핵어사로 파견, 이듬해에 귀경하여 그곳의 속전(贖錢)·삼가(蔘價)·환모(還耗)의 문제점을 보고하였다.
1783년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데 크게 공헌한 이순신(李舜臣)·고경명(高慶命)·조헌(趙憲)·곽재우(郭再祐) 등을 표창하고, 아울러 숨어있는 인재를 발굴, 육성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듬해 양주(楊州) 지방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으며, 『수교찬집(修敎纂輯)』 낭청(郎廳)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785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793년에는 대사간이 되어 언로의 폐색을 비판하고 관직의 잦은 교체를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직의 정립은 국가 유지의 근본이고, 국가 유지의 근본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기강을 세워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또 삼남 지역에서 풍년임에도 불구하고 소의 도살이 심하여 곡식 운송에 차질을 빚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 해 병조참판에 임명되자, 효종 때처럼 군복을 편리하게 개량하여 전투력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고령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흉년으로 인한 참상을 보고하고 진율정책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 군정을 감소하여 백성들의 곤란한 생활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하였다. 1797년에는 충청도관찰사에 재직하다가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