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0월 15일 충청북도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에서 미감리회 주1(매서인[^2])로 활동하던 전연득과 최마리아 사이의 1남 4녀 중 맏딸로 출생했다. 충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 공주 영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감리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원주 지방 순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지방 내 30여 교회를 순방하며 주일학교와 여선교회를 지도하였다. 1939년 원주 지방 선교사 모리스의 후원으로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青山学院〕 신학부에 들어가 일 년간 수학하였고 귀국 후 원주읍교회(현 원주제일교회), 원산 중앙교회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월남하여 서울 남산교회와 인천 창영교회 전도사로 사역하였고 1951년 인천 갈월교회를 개척, 담임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1930년 제1회 총회에서 ‘여자 목사 안수’ 제도를 채택하였지만 19311932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연회에서 2030년 경력의 여자 선교사들만 목사 안수를 받았고 한국인 여성 목사는 배출하지 못했다. 또한 당시 감리교회법으로 3년 이상 담임 목회를 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전밀라는 갈월교회를 3년간 담임한 후 1955년 3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에서 의왕시 부곡교회 주3 명화용 전도사와 함께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두 달 후인 1955년 5월 장로교 계통의 재건교회에서 최덕지 목사가 안수를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후 인천 창영교회 부목사를 거쳐 1960년 3월 서울 불광동 양광교회 담임자로 6년간 주4 1966-1974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 부녀국 총무와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로서 감리교회의 여성 사업을 총괄 지도하였다. 1974년 양광교회 부목사로 복귀하였다가 1979년 5월 은퇴하였다.
은퇴 후 정릉 안식관에 머물다가 1985년 10월 30일 별세했다. 평생 독신으로 목회하면서 가부장적 전통 문화와 ‘여성 목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투쟁하였다.
1968년 이화여자대학교로부터 ‘종교인상’을 수상하였다. 사후 양광교회에서 주5 『또 다시 기다리는 마음으로』(1986)를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