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언절구 4수이다. 김택영(金澤榮)이 편한 『매천집(梅泉集)』(7권, 1911, 상해) 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절명시」는 작자 황현이 한일합병을 당하여 8월 7일(음력)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하면서 남긴 시이다.
황현은 종사(宗社)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라도 죽어야 옳다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하지 못하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다. 그는 인간 양심을 지키려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순명(殉名: 올바른 명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한 것이었다.
「절명시」 제 1수에서 작자는 이미 을사년부터 순명을 결심해왔음을 말한다., 창천을 비출 촛불에다 자신의 외가닥 양심을 비유하고 있다. “난리통에 어느새 머리만 허예졌누/그 몇번 목숨을 버리렸건만 그러질 못했던 터/하지만 오늘은 정녕 어쩔 수가 없으니/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未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절명시」 제 2수는 나라의 종언(終焉)을 고하는 양국조서(讓國詔書)가 체결되었으므로 옥음(玉音 : 임금의 음성)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하며 슬퍼하였다. 「절명시」 제 3수는 식자인(識字人)으로서의 자책을 드러내었다. “새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기는 듯/무궁화 삼천리가 다 영락하다니/가을밤 등불 아래 곰곰 생각하니/이승에서 식자인 구실하기 정히 어렵네(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절명시」 제 4수는 자신이 죽는 것은 충(忠)을 다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나 적을 탄핵하다가 참형 당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못하고 겨우 몽고병의 침입 때에 자분(自焚)하고 만 윤곡(尹穀)의 뒤나 따를 뿐이라고 통탄하였다. 「절명시」는 우국(憂國)의식이 짙은 높은 수준의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