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 나주 출신. 아버지는 봉산훈도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씨(羅氏)이다.
유년시에 보성군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 년간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 지리 · 의약 · 복서(卜筮) 등의 잡학을 강구하였다. 그 뒤 산에서 나와, 서울에서 박순(朴淳) 등과 종유하며 학문을 강구한 뒤, 만년에 전라도 무안의 엄담(淹潭)에 이주해 윤암(輪巖)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예학(禮學)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1574년(선조 7)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 1583년 영의정 박순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지만, 수차의 관직 제수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그의 관직생활은 46세에 북부참봉을 지낸 이후 55세에 나주훈도, 58세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그리고 60세 되던 해 이산해(李山海)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 데 그쳤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 때 이의 처리과정상 연루자의 색출이 지방 사류에게까지 확대되는 와중에서,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같은 해 6월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로 이배되고, 7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가문이나 관직생활은 평범해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에 피화된 뒤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616년(광해군 8) 그를 봉사하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엄담에 건립된 뒤 1694년(숙종 20)까지 집권세력의 당색에 따라 몇 차례 치폐(置廢)를 반복, 서원과 당쟁의 연계라는 드문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산서원의 치폐는 남인의 집권시에 건립, 복설되고, 서인의 집권시에는 훼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포폄도 기복을 겪는다. 또한, 호남지방의 사류들이 다수 이 분쟁에 관련되어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스승으로는 서경덕(徐敬德)과 박순의 이름이 거론되나 전후사정을 검토해볼 때 박순을 종유했다는 설이 타당해 보인다. 문생들이 400여 명에 달했다 하는데, 그 중 저명한 자로는 나덕준(羅德峻) · 나덕윤(羅德潤) · 나덕현(羅德顯) · 나덕원(羅德元) · 안중묵(安重默) · 최홍우(崔弘宇) · 정식(鄭湜) · 유양(柳瀁) · 윤제(尹濟) · 정지함(鄭之諴) 등 당시 호남지방의 유력 가문 출신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주목된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