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온 사패왕지는 1399년(정종 1) 2월 8일, 국왕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정사공신(定社功臣) 한천군 조온에게 공전(功田)을 사여(賜與)한 사패왕지(賜牌王旨)이다. 1992년 7월 28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1폭의 필사본(원본)으로, 세로는 82.4㎝이고 가로는 80.7㎝이다. 양질의 저지(楮紙)에 총 11줄에 걸쳐 행서체(行書體)로 썼다.
조온(趙溫, 1347~1417)은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의 아들로,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이 되고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세자인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을 옹호하는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등을 몰아내는 데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평정하여 이듬해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부원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 문서는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에 대한 포상으로 전지를 내리는 사여왕지이다. 정사공신에 대한 특전과 포상은 공신녹권에 명시되어 있거니와, 이 왕지에는 녹권에 기재된 150결(結)의 공전에 대해 그 지방의 위치와 결(結) · 부(負) · 속(束)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당해 지번을 적었는데, 예컨대 ‘업자(業字), 월자(月字)’ 등의 우측에 바뀌어진 지번 ‘금채(今彩), 금영(今盈)’ 등을 적고 있다.
그 공전은 양주(楊州) · 견주(見州) · 교하(交河) · 개성(開城) · 광주(廣州) · 연안(延安) · 이천(利川) · 강화(江華) · 서원(瑞原) · 마전(麻田) · 수원(水原) 등에 위치한 전답 150결 38부이며, 이를 자손들이 영구히 소유하도록 왕지를 적었고, 문서의 말미에 왕지를 받은 연월일을 적었다. 또한 이를 확증하는, 3개의 ‘조선왕보(朝鮮王寶)’라는 새보(璽寶)를 ‘왕지’, ‘한천군 조온’, ‘연월일’의 위치에 각각 주인(朱印)으로 찍었다. 그리고 끝에 왕지를 받들어 사급(賜給)하는 ‘도승지……지이조사(都承旨……知吏曹事) 이(李, 文和)’가 서명, 수결(手決)하고 있다.
이 왕지는 정사공신에게 사여한 공전문권(功田文券) 가운데 처음 발견된 것으로, 조선 초기 공신 연구는 물론, 고문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 초기의 사령홍패 등의 왕지는 현재 10여 건이 발견되어 문화재(현, 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나, 사패왕지는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