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사람에 의하여 계획되고 지어지는 바와 같이 정원도 계획되고 만들어져야 한다. 설사 자연 그대로의 동산이 정원의 일부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어지는 집과 관련되기 때문에 만들기 전에 세심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을 계획하고 만들고 가꾸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 사람이 바로 정원사인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의 동산바치는 바로 이 정원사를 말하는 것이다.
정원사나 동산바치는 최근에 널리 쓰이는 조경가와는 상당한 의미의 차이가 있어 조경가가 더 확대된 뜻을 가지게 된다. 원래 서양에 있어서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보다 많은 위락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공원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 또는 근세의 대저택이나 궁궐·수도원 등에 정원을 만드는 조원술에서 탈피하여 이를 사전에 계획하는 조경학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조경가라는 이름은 1890년대에 옴스테드(Olmsted)가 자신을 조경가라 지칭한 데에서 시작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조경학의 분야가 확대되어 더더욱 정원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원은 단순히 집이나 궁궐·서원·사찰 등 단위적인 건물에 딸린 뜰이나 동산·못 등의 공간을 가꾸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조경은 미국조경학회평의회의 정의처럼 토지에 관련된 설계 계획, 그리고 관리의 기술로서 자원의 보전과 관리, 경영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적·과학적 지식을 동원한다.
또한 이를 활용하여 자연적인 요소와 인공적인 요소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이와 같은 환경이 유용하고도 유쾌하게 조성되도록 창조하는 기술이라 하겠다. 이로써, 정원이라는 개념은 조경보다 축소된 개념이며 공공적인 차원이 아닌 사적인 소유의 개념에 기반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원은 주택에 딸린 주택 정원, 궁궐에 딸린 궁원(宮園, 宮苑), 사찰의 사찰 정원 및 서원 정원 등 각종 건축물에 따라 양식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그 근본원리는 같다. 일반적으로 정원이라 할 때에는 각 건물을 구별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정원은 주로 주택의 것이 주를 이루며 궁궐의 것은 궁원으로 통한다.
또, 궁원 중에는 창덕궁 금원처럼 궁궐 후원에 특별히 만든 것도 있다. 이것은 정원이 일반적으로 어떤 건축물이 지어진 다음 이에 따라 자연히 형성되는 공간에 꾸미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 정원 자체를 계획하여 별도로 만드는 것도 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이런 유의 것으로는 또 별서 정원이 있다.
우리 나라 정원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현재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정원이 건축에 딸린 뜰과 동산으로서 인공적인 건축 공간에 자연적인 요소를 이루어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건축이 건축답게 지어지기 시작한 뒤부터라 추측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면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중에서 우선 고구려부터 고찰을 하여보면 시조 동명성왕 6년(서기전 32)에 신령스러운 공작이 궁정에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궁궐 건축에 이미 정원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성왕 이후에도 신령스러운 공작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또 장수왕 2년에는 기이한 새가 왕궁에 모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유리왕 3년에는 별궁(別宮)을 지었고, 또 양곡(凉谷)에다 동서(東西) 두 궁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시대는 초기부터 궁궐에 정원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유리왕 22년에는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여 대보(大輔)의 직(職)에 있던 협보(陝父)가 이를 간하였다. 그러나 왕이 노하여 그를 관원(官園)으로 좌천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궁궐의 정원을 관리하는 직종이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최근에 발굴 조사된 안학궁지(安鶴宮址)는 고구려의 정원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 궁은 551년(양원왕 7) 장안성을 축조할 때 만들기 시작한 듯한데, 한 변이 약 620m 되는 방형의 궁성 속에 남궁·중궁·북궁·서궁 등으로 나누어 52개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조산은 남궁의 서쪽과 북궁의 북쪽에, 원림은 동쪽·남쪽·서쪽·북쪽 모두에, 원은 남궁 서쪽 조산 앞에, 연못은 궁성 동쪽 모퉁이에 두었다.
특히, 연못에 흘러드는 물줄기는 성곽 북쪽 벽에 뚫은 수구(水口)로부터 연못 옆으로 하여 남쪽 수구로 나가게 하였다. 이것은 궁궐의 연못을 만들기 위하여 일부러 물을 끌어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 백제의 정원을 고찰하면 백제는 고구려보다는 더 상세한 기록들이 보인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武王條)에 "삼월 연못을 궁궐 남쪽에 파고, 물을 이십여 리로부터 끌어들이고 연못 사방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부여(扶餘)에 궁남지(宮南池)라 부르는 연못을 판 기록이다.
이 연못의 모양은 연못 네 가장자리[四岸]라는 구절로 보아 사각형으로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구절은 바로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인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 가운데 하나를 본떠서 작은 섬을 만든 것으로, 연못을 만드는 데에 도가의 신선 사상이 관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의자왕 15년에는 대궐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도 신라시대의 임해전(臨海殿)과 마찬가지로 궁남지를 바다로 생각하고 이를 바라보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이나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석조들은 모두 당시의 정원에 놓았던 석물들로서 당시 정원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여준다.
신라의 정원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서간조에서 서기전 32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이사금조(沾解尼師今條)에서는 252년 4월 용이 궁궐 동쪽 못에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 누워 있던 버들이 저절로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궁궐에서 연못을 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통일신라시대인 674년(문무왕 14) 2월 “궁내에 연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가지각색의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키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잘 뒷받침해준다. 또, 같은 676년에는 양궁(壤宮)을 짓고 679년에는 궁궐을 중수한 바 극히 화려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또 760년(경덕왕 19) 2월에도 궁중에 큰 못을 파고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개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러한 기록에서 신라 및 통일신라시대의 궁궐에는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에 도교와 관련된 선산(仙山)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정원의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통일신라시대의 정원에 대하여 가장 확실히 전해주는 것은 경주안압지(雁鴨池)와 임해전지(臨海殿址)라 하겠다. 이 연못과 전각은 800년(소성왕 2) 4월에 폭풍이 심히 불어 기왓장들이 날아가고 임해문(臨海門)이 파괴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에 이미 임해전(臨海殿)은 건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임해전이 그 앞의 연못(안압지)을 바다처럼 생각하여 바라본다는 뜻이기 때문에 연못도 이미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조성 시기는 아마도 앞에 말한 674년부터 679년 사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임해전이라는 명칭은 697년(효소왕 6)에 나타나지만, 안압지라는 명칭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최근 이 안압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총 5,800여 평 되는 면적 속에 호안(護岸)길이가 1, 330m이다. 연못의 서측은 동궁(東宮)과 연결되었고, 다섯 개의 건물(정자 등)들이 세워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못 가운데는 괴석(怪石)들이 물 위에만 그 모습을 내밀도록 지름 50㎝ 정도 되는 돌들을 쌓아 축대를 만들었다.
북쪽과 동쪽으로는 산봉우리들을 만들었으며, 호안들은 굴곡이 져서 여기에 놓은 괴석들과 더불어 마치 바닷가처럼 보이게 하였음이 밝혀졌다. 또, 연못 가운데는 세개의 섬이 이루어졌었고, 수구는 북동쪽 호안에 나타났다. 아마도 이 못에 물을 끌어들인 것은 북천(北川)의 물인 듯하다.
경주의 고지도에도 북천으로부터 황룡사 앞으로 하여 안압지 옆을 지나 계림을 통하여 남천(南川)으로 흘러 들어가는 개천이 그려져 있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포석정(鮑石亭)은 중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유상곡지연(流觴曲之宴)에서 연유된 것이다. 돌로 전복 모양의 물 흐르는 작은 도랑을 만들어 술잔을 띄워 보내면서 시를 짓고 즐기던 특수한 정원의 한 예인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일찍이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되었던 정원 양식이 그대로 계승, 발전된 듯하다. 『고려사』 의종조에는 “11년(1157) 여름 4월에 민가 50여 채를 헐고 태평정(太平亭)을 만들고 태자에게 명하여 현판을 쓰도록 하였으며, 아름다운 꽃을 심고 진기한 과실수를 심었다.
또, 기이하고 화려한 것들을 좌우로 늘어놓고 정자 남쪽에 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짓고, 그 북쪽에는 양이정(養怡亭)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지붕에 청자 기와를 얹고, 남쪽에 양화정(養和亭)을 짓고 종려나무잎으로 지붕을 덮고, 또 옥석(玉石)을 갈아 관희대(觀喜臺)와 미성대(美成臺)라는 두 대를 쌓았다.
또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었으며, 멀리서 물을 끌어들여 폭포[飛泉]를 만든 바 극히 화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도 정원에는 연못을 파고, 봉래선산(蓬萊仙山) 혹은 방장선산 등 삼신산을 본떠서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못가에는 정자를 짓고, 또 괴석들을 늘어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공으로 폭포도 만든 것은 삼국시대보다 발달된 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형성되었던 정원의 양식은 다만 문헌과 그 유적지를 통하여 고찰이 가능하나, 조선시대부터는 현존하는 유구로써 그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정원의 구성원리와 형식·종류 등은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구성 원리가 그 바탕이 된 것으로 이는 동양 삼국(우리 나라·중국·일본)이 같다. 동양의 정원은 일찍부터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자연과 신비가 강조되고, 자연히 자연스러운 형태를 이루게 되어 비정제성(非整齊性)을 가지게 된다. 동양인은 항상 사람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자연 속에 몰입하여왔다.
이러한 태도는 정원에 그대로 반영되어 대자연 속에서 소요자적하던 사람의 자연에 대한 경험을 정원 속에 다시 형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원야 園冶』라는 중국의 책에서도 “비록 사람이 만들었기는 하나, 마치 하늘이 자연적으로 만들어놓은 것같이 느끼게 한다(雖由人作 宛自天開).”고 구성 원리를 밝히고 있다.
『원야』에 기록된 내용은 흥조론(興造論)·원설(園說)·상지(相地)·입기(立基)·옥우(屋宇)·장절(裝折)·난간(欄杆)·문창(門窗)·장원(墻垣)·포지(舖地)·철산(掇山)·선석(選石)·차경(借景) 등이다. 이 중 정원 구성 원리의 핵심은 인차(因借)로서 인과 차는 상보상성(相補相成)하는 음양오행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인은 지세와 지형에 맞추어 정원을 꾸미고 또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차는 차경을 말하는 것으로 건축물간의 적당한 배치, 그리고 이들이 정원의 경관과 조화되도록 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터 주위에 있는 자연의 경관과도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여 집이나 정원 모두가 자연의 일부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동양 정원의 구성 원리는 그 근본에서는 같으나, 그 세부 수법에서는 동양 삼국이 조금씩 다르다. 중국의 정원은 보통 정원 속에 대자연의 산악·폭포·계곡·동굴 등을 모방하여 만든다. 마치 대자연의 축도처럼 하고, 또 기암괴석을 늘어놓고 문·창살·난간·담장 등에 너무나 많은 변화를 주어 보는 사람을 현란하게 한다.
또, 일본의 정원은 많은 제약과 규칙을 두어 같은 자연을 두되 너무나 인공적인 형태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보고 즐기며, 또 모든 것, 즉 사람이나 건축 모두가 자연의 일부가 되도록 한다. 우리 나라는 전 국토의 약 3분의 2가 산지로 되었기 때문에 도처에 완만한 구릉이 많다.
그래서 집터를 잡으면 대개 집터 뒤로는 구릉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단(段)을 지으며 뒤뜰[後庭]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후정의 대표적인 실례는 창덕궁 낙선재의 후정이나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이다. 후정을 꾸미는 일은 동산과 관계되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원사를 동산바치라 불렀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정원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의 하나가 연못[池]이다. 이 연못도 그 터가 연못을 팔 형편이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연못에 심은 연꽃을 바라본다. 하지만, 연못을 팔 수 없는 동산에서는 산정(山亭)을 짓고 연못 대신 석지(石池)를 늘어놓아 연꽃을 키운다. 또, 시냇물[溪流]이 흐르면 계정(溪亭)을 지어 냇물을 바라보며 즐긴다.
즉,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정원을 가꾸며, 결코 억지로 꾸미지는 않는다. 이러한 성격은 나무를 심는 데에도 잘 나타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에서는 정원에 결코 늘푸른 나무나 잔디를 심지 않는다. 봄이면 움트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며 겨울이면 힘찬 가지에 눈꽃이 하얗게 피는 활엽수들을 심는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나 집이나 뜨락 모두가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고, 자연대로 살고자 하는 것에 우리 정원의 큰 구성 원리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 나라 정원에 있어 석물은 가장 두드러진 시각적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담장이나 굴뚝·마당 등은 모두 집을 지음에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 석물 만큼은 순전히 정원에 늘어놓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두드러지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또, 석물은 그 종류가 많으며, 종류에 따라 만들어진 석물의 모양도 가지가지로 변화가 많다. ① 물확[水碓, 石碓] : 물확은 돌확이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작은 돌절구를 의미한다. 과히 크지 않은 돌덩어리를 정으로 쪼아 중앙에 큰 홈을 파서 여기에 물을 담아 마당에 놓아둔다.
이 물확은 돌절구로도 쓰이기 때문에 부엌 앞마당이나 부엌 옆마당에 놓일 때가 많다. 정원의 석물로서는 사랑채 뒤뜰에 놓여질 때가 많다. 물확의 모양은 원형·다각형·특수형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각 형별로도 여러 모양을 이루고 있다.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관가정(觀稼亭)의 물확은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놓인 것은 거북이 잔등 위에 용이 몸을 틀어 물 담는 수반을 형성한 것으로 왕궁의 물확답게 정교하다. 교태전의 또 다른 물확은 연꽃 잎사귀로 수반을 형성하였는데, 윗면 가장자리 네 곳에는 방금 물에서 기어 나온 모습의 개구리가 한 마리씩 새겨져 있어 정적인 물확에서 동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② 석지(石池) : 석지는 석련지(石蓮池)라고도 하며, 물확보다 크다. 대개 큰 덩어리의 돌을 직육면체로 다듬어서 그 윗면을 파 물을 담고 연꽃을 키운다. 석지는 연못을 팔 수 없는 마당에 잘 늘어놓는데, 대개의 경우 사랑채 앞마당이나 후원에 놓는다.
석지의 모양은 대개 방형이며 특수한 형태의 것이 가끔 보인다. 창덕궁 낙선재 후정의 것은 단순한 직육면체의 석지를 정교하게 조각한 원구의 받침대로 받치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에는 방형으로 된 것과 연꽃 잎사귀 모양으로 조각된 것이 있다.
③ 석조(石槽) : 절의 승방이나 주택의 우물가에 놓고 물을 담던 커다란 돌로 된 물통이다. 이것은 대개 직육면체로 되어 있으나 백제시대의 부여석조나 공주반죽동석조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
④ 석함(石函) : 괴석을 담아 마당에 늘어놓는 석물로서, 괴석을 받친다는 뜻에서 괴석대(怪石臺)라고도 한다.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석물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모양을 지니고 있는데, 주로 괴석을 담는 대의 평면모양에 따라 방형·다각형·특수형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평면이 방형인 것은 그 전체 모양이 대개 직육면체가 되는데, 각 면에 조각을 하지 않은 단순한 것과 각 면에 특수한 조각을 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낙선재 후정에는 면에 봉황과 구름을 조각하고 받침대에는 호랑이를 조각한 아주 정교한 방형의 석함과, 면에 구름무늬가 조각되고 받침대는 기단 모양으로 된 석함이 있다.
또한, 낙선재에는 각 면에 꽃잎이 정교하게 조각된 육각형의 석함, 대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팔각형 석함, 받침대를 개다리소반 모양으로 만든 석함 등도 있다. 장서각에는 아무 조각이 없는 육각형의 석함이 전하고 있다. ⑤ 대석(臺石) : 화초분이나 등불 또는 석함을 받치던 석물로서, 그 모양도 방형·다각형·원형·특수형으로 나누어진다. 경복궁 교태전의 후정인 아미산에 놓여 있는 대석은 위의 대와 밑동은 방형이지만 중간 부분은 원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대 윗면에는 철제로 된 다리를 고인 듯한 홈이 패어 있는데, 이러한 모양의 것이 서울 동묘 뜰에서는 해시계를 받쳐놓았던 것으로 미루어 이것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창덕궁 금원 안의 돈덕정 앞뜰의 것은 석함을 받쳐 놓는 대로 쓰였다.
창덕궁 금원 안의 연경당 안마당 담모퉁이에 놓인 것은 육각형의 여러 층으로 된 대석이다. 서울 자하문 박씨가에는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대석이 있다. 거북이의 등 위에는 작은 석함을 받쳐 놓았다. ⑥ 식석(飾石) : 식석은 커다란 돌을 조각하여 정원에 늘어놓은 것으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시각적 조형물이 된다.
창덕궁 주합루 앞에는 각 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장방형의 식석이 놓여 있다. 경복궁 수정전 석계 옆 나무 밑동에는 애초 나무가 자랄 때부터 박아 넣은 식석이 있는데, 이에는 음양의 상징적인 결합을 보여주는 듯한 면이 있다.
또, 경복궁 자경전 기단 앞에는 석주 위에 해태로 보이는 동물을 조각한 식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화재를 방지하는 주술적 뜻이 있다.
⑦ 석상(石床) : 석상은 커다란 자연적인 반석 또는 큰 자연석을 판석으로 다듬어 마당에 놓고 그 위에 걸터앉거나 차를 끓이는 데 이용하는 석물이다. 정약용의 다산초당 마당에는 자연석으로 된 석상이 있는데 이곳에서 차를 끓였다고 한다. 창덕궁 낙선재 후정 앞에 놓인 석상은 걸터앉을 때 쓰던 석상으로 추정된다.
⑧ 하마석(下馬石) : 노둣돌이라고도 하는데, 이 돌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딛는 돌이다.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기단 앞에는 잘 다듬어 만든 하마석이 놓여 있고, 서울 안국동 윤씨가의 솟을대문 앞에도 직육면체의 커다란 하마석이 놓여 있다. 이와같은 것은 정읍 김동수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샘터는 정원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물을 실생활에 공급해 주는 실용성으로도 중요한 것이지만, 연못을 파고 여기에 물을 대주는 구실도 하여준다.
서울 자하문 박씨가의 샘터는 샘터의 바닥을 커다란 장방형으로 하여 그 안을 보다 작은 방형 두 개로 나누고, 한쪽은 방형으로 다른 쪽은 원형으로 물이 괴는 홈을 판 독특한 것이다.
전라남도 대흥사에 있는 샘터는 석축에 방형으로 뚫고 그 안에 물받이 돌을 끼워놓은 것이다. 경복궁 향원정 후편에 있는 샘터는 물이 향원정 방지(方池)로 흘러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큰 원형 속에 방형의 물이 괴는 부분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물이 흘러 나와 보다 작은 방형의 단 사이에 뚫은 둥근 구멍을 통하여 다시 아랫단으로 흐르면서, 연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또 우물 뒤로는 반원형으로 석축을 쌓아, 전체적으로 원형과 방형을 대조시키면서 조화시킨 특수한 샘터이다.
연못과 정자는 주택이나 궁궐 건축의 정원이나, 동리의 경치 좋은 곳에 많이 지어진다. 연못은 대개 방형으로 생긴 방지가 일반적이고, 궁궐에 있어 반도지(半島池)와 같은 특수한 형태의 것도 있다. 연못의 가장자리는 막돌로 쌓아 마무리를 하거나, 장대석의 다듬은 돌로 정교하게 마무리하기도 한다.
또, 연못의 중앙에는 작은 섬을 만드는데 이것은 본래 삼신산을 본떠 만든 것으로, 이 섬이 클 때에는 여기에 정자를 만들고 다리로 연못 가장자리와 연결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못에는 연을 심는데, 이것은 불교적인 영향이라 하겠다.
주택이나 궁궐·서원 등의 정원에서 빗물을 모아 집터 밖으로 끌어내는 데는 도랑이 필요하고, 또 연못을 팠을 때 샘터에서 흘러든 물이 연못에 넘쳐 집터 밖으로 내보낼 때에도 필요하다. 또한, 커다란 연못을 파고 이 연못에 다른 개천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일 때 도랑이나 개천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도랑이나 개천은 정원 속에 물이라는 이질적인 시각적 요소를 구성하여 주고, 또 움직이는 요소로서 정원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창덕궁 연경당의 도랑은 집터 속의 빗물을 모아 터 밖으로 내보내는 구실을 하여준다. 창덕궁 부용정에 설치된 도랑은 빗물을 모아 방지로 흘러들게 하는 도랑이다.
옥산서원의 도랑은 집터 밖 개천에서 일부러 물을 끌어들여 이 서원의 누문(樓門) 앞을 흘러 터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다리는 도랑이나 개천 위에 많이 건축되고, 또 연못 가운데 섬을 연결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진다. 다리는 석재로 만든 석교(石橋)가 주종을 이루나 때로 목재로 만든 다리[木橋]도 만들어진다.
궁궐 건축에서의 다리를 보면 경복궁에서는 홍례문(弘禮門)에서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는 중간에 영제교(永濟橋)가 건조되었고, 창덕궁에서는 금천교(錦川橋)가, 창경궁에서는 옥천교(玉川橋)가 건조되었다. 이들 다리들은 모두 궁궐 건축에서 그 가장 중심 전각이 되는 정전(正殿)으로 도달하는 중요한 것으로 일반 다리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양식은 개천 바닥에 아치를 쌓아 교각을 만들고, 그 위로 장대석의 도리를 걸쳐, 장대석들을 도리 사이에 보 모양으로 놓아 마무리하였다. 다리의 난간에는 하엽을 놓아 난간두겁대를 받치고, 양측 엄지기둥에는 돌짐승을 조각하였다. 또, 다리 바로 앞 개천 가장자리는 장대석으로 마무리하였다.
여기에 커다란 돌짐승이 물로 내려가려는 모양을 하고 있어 동적인 요소를 이루어주고 있다. 창덕궁 연경당 솟을대문 밖의 돌다리는 좁은 도랑 위에 걸친 만큼 두꺼운 판석을 양측에 얹고 작은 돌기둥을 네 곳에 세운 아주 소박, 단순한 것이다. 경복궁 향원정 연못가에서 연못 가운데 섬에 이르도록 만든 다리는 나무로 만들었다.
우리 나라의 지형은 구릉지가 많기 때문에 주택·사찰·궁궐 등의 뒷 터에는 언덕이 많다. 따라서, 정원을 꾸밀 때에는 이 언덕에 여러 층으로 단을 쌓게 된다.
이 때 층층이 쌓은 단은 잘 다듬어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거나 막돌로 쌓기도 한다. 그 단 위에 화초·나무를 심고 또 괴석대 등의 석물을 늘어놓는다. 창덕궁 낙선재 후정의 석단은 우리 나라 후정의 대표적인 석단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정원의 구성 요소가 되는 계단(階段)으로는 애당초 건물의 기단에 설치된 계단이 있고, 한편 낮은 터에서 높은 터로 올라갈 때 만들어지는 계단이 있다. 보통의 계단은 막돌로 쌓으나 낙선재 후정에서처럼 석단을 잘 다듬은 돌로 쌓을 때에는 계단도 이에 조화되게 잘 다듬은 돌로 쌓는다.
궁궐 정전의 기단에 만들어진 석계는 전체가 삼분되어 그 중앙부에는 봉황 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면석이 있어 어도(御道)임을 나타내고 있다.
궁궐·사찰·서원·향교 등의 경우와 같이 비교적 넓은 뜰을 구성할 때에는 여러 개의 돌로 포장된 돌길이 만들어진다. 특히, 궁궐에서는 임금이 다니는 길은 어도라 하여 일반 길보다 한층 높게 하였다. 종묘의 어도를 보면 길폭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중앙부 양측에는 탄석을 세워 꽂고 돌들을 깔았다.
양쪽 길의 면보다 한층 높게 되어 있다. 징검돌은 흙바닥의 마당에 걸음걸이의 간격에 맞추어 대략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아 비오는 날에도 다니기 편하게 한다. 이들 돌길이나 징검돌은 모두 정원에서 어떤 방향을 암시해주고 움직임을 주는 선적인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에, 상당히 강한 시각적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정원에 심는 식재(植材)로는 크게 수목·화초·채소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수목은 건조한 땅에 심어야 할 나무(적송·흑송·금송·졸참나무·갈참나무·매화·해당화·향나무·철쭉 등)와 습한 땅에 심어야 할 나무(잣나무·수양버들·태산목·무궁화)를 구분하여야 한다.
또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과실수(대추나무·감나무·복숭아나무·자두나무·앵두나무·사과나무 등)와 단순히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아름다워 바라보는 나무(석류·주목·산사나무·돈나무·매화나무·모과나무·주엽나무 등)로 구분하여 적절하게 심는다.
또, 그늘에서도 잘 자라나는 나무(주목·돈나무·동백나무·진달래·단풍나무 등)와 양지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은행나무·소나무·참나무·수양버들·매화나무 등)를 잘 구별하여 심는다. 이들 나무들은 정원에 그늘을 형성해준다.
또 그 모양이 아름다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며,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화함으로써 흥미를 일으켜주는 것이다. 이 변화는 형태와 색채에서 동시에 일어나므로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화초는 꽃이 피는 것과 꽃이 피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꽃은 일년생이거나 다년생을 막론하고, 그 크기가 대략 한길 못 되는 것을 말한다.
마당 앞이나 담장 밑에 심거나, 또는 분(盆)에 심어 대석(臺石)에 받쳐놓거나 댓돌 위에 늘어놓는다. 작약·난초·국화·양귀비·박하·모란 등은 아름답거나 향기가 좋은 꽃들이다. 풀은 잔디·새·갈대 등이 있는데 잔디를 마당에 온통 까는 일은 흔하지 않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영향을 받은 뒤에 만든 것이다.
정원에는 채소밭도 가꾸어진다. 채소의 종류는 배추·무·마늘^상추 등으로 담장 밑이나 뒷마당·부엌 옆마당 등 공터가 있으면 심었다. 식생활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실용 정원으로서의 성격도 가진다. 또, 탱자나무 같은 것은 울타리로 쓰임으로써 생울[生垣]의 재료가 된다. 이상 말한 식재들은 문헌상에도 나타난다.
문헌상에 주로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괴목·버들·배나무·잣나무·모란·매화·복숭아·오얏·소나무·대나무·산수유·연꽃·철쭉·차 등 굉장히 많다. 이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파한집』·『동국이상국집』·『보한집』·『산림경제』·『임원경제지』·『양화소록 養花小錄』 등에 나타난다.
거의 전체가 철따라 바뀌는 활엽수 계통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기후가 사계절이 뚜렷한 데서 온 결과라 추측된다.
마당은 정원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가 된다. 특히, 우리 나라의 건축은 집터를 담장으로 쌓고 그 속에 여러 채[棟]의 건물을 짓고, 그 사이사이를 다시 담장으로 막기 때문에 여러 개의 마당이 이루어진다. 즉, 앞마당·옆마당·뒷마당·행랑마당·사랑마당·안마당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들 마당 위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으며, 또 석물을 늘어놓게 됨으로써 정원 구성의 바탕이 된다. 또한, 이 마당은 그 바닥을 흙바닥으로 잘 다져서 빗물이 잘 빠지게 한다.
그래서 정원공간에 커다란 수평적 요소를 이루어주기 때문에 수직적인 요소인 굴뚝·난간·건물·수목들의 그림자를 받아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미있는 변화를 이루어주고 있다.
또, 마당은 집터가 구릉을 끼고 자리잡을 때에는 지형에 따라 자연히 높낮이 차가 생긴다. 또 사랑마당·행랑마당 등 마당의 성격에 의하여도 위계성(位階性)이 생김으로써 공간 구성에 동적인 변화를 주게 된다. 또, 주택에서는 이 마당에 장독대가 설치되고,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에는 차일이 쳐지고 멍석이 깔린다.
이로써 내부공간이 다 이루지 못한 기능을 받아 이루어주는 반내부공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궁궐에도 정전의 앞마당에는 품계석(品階石)들이 줄지어 서 있어, 국가의 대사 때 신하들이 줄지어 늘어선다. 또 어떤 때는 차일이 쳐지고 잔치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당에는 차일의 쇠고리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굴뚝은 순전히 건축적인 구조물이지만 일단 이것이 건축되면 정원에 있어 중요한 수직적인 시각적 요소가 된다. 특히, 우리 나라의 굴뚝은 대개 건물로부터 떨어져서 독립된 구조물로 건축되기 때문에 이것은 수평적인 요소인 마당·연못 등과 좋은 대조를 이루게 된다.
경복궁 교태전의 후정인 아미산의 굴뚝은 육각형으로 각면에는 무늬를 넣고, 그 지붕은 기와 지붕으로 연기가 나오는 곳에 연가라고 부르는 토기를 얹어 그 창구멍으로 연기를 내뿜도록 하였다. 굴뚝을 쌓는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 정원마다 특이한 시각적 요소가 된다.
담장은 집터를 둘러막아 담장 바깥과 담장 안을 구별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구조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원의 경계를 정하여 주고 또 마당에 심은 화초·수목·굴뚝·석물 등의 수직적인 요소들을 한 공간 속에 잡아 매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정원의 중요한 수직적 구성 요소가 된다.
또 담장은 쌓는 방법과 모양을 여러 가지로 달리하기 때문에 정원 안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조화를 이루어 재미있는 시각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정원을 구성하는 요소는 위에서 말한 것 외에도 건축물 자체에 따라 건축되는 난간^문과 창의 살 짜임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건축물의 한 부분으로서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시각적으로 질감·색채·명암·형태 등의 대조를 이루어 정원의 중요한 요소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