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성지(成之), 호는 문암(文巖). 고향은 경상북도 영주(榮州) 줄포(茁浦)인데, 고조부 때부터 이 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진사 정태신(丁泰愼)이며,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 이하장(李夏章)의 딸이다.
5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며 큰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는데, 특히 경전(經傳)을 탐독하고, 율력(律曆)·병기(兵機)·복서(卜筮)·주수학(籌數學)을 연구하기도 했다.
26세에 향시에 참여해 수석에 오르기도 하고, 36세에는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인 과거시험 준비도 하였으나, 과장(科場)에 들어갔을 때 척족(戚族)되는 사람이 지공거(知貢擧)로서 정지성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과거를 포기하고 말았다.
정지성의 관직은 83세 때 노인의 대우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라는 이름뿐인 직책을 받았으나, 초야에 묻힌 선비로서 18세기 당시 사회를 우국(憂國)의 시각으로 파악하면서 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문암집(文巖集)』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칠실공담(漆室空談)은 정지성의 개혁정신을 담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정지성의 초기 실학적인 사상은 족손인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져 실학(實學)이 집대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지성의 학문은 세간에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주(榮州) 사계서원(泗溪書院)을 중심으로 그 지역 선비들에게 읽혀지고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문암집(文巖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