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성 ()

문암집 / 정지성
문암집 / 정지성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문암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성지(成之)
문암(文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18년(숙종 44)
사망 연도
1801년(순조 1)
본관
압해(押海)
출생지
영주
정의
조선 후기에, 『문암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성지(成之), 호는 문암(文巖). 고향은 경상북도 영주(榮州) 줄포(茁浦)인데, 고조부 때부터 이 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진사 정태신(丁泰愼)이며,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 이하장(李夏章)의 딸이다.

5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며 큰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는데, 특히 경전(經傳)을 탐독하고, 율력(律曆)·병기(兵機)·복서(卜筮)·주수학(籌數學)을 연구하기도 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26세에 향시에 참여해 수석에 오르기도 하고, 36세에는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인 과거시험 준비도 하였으나, 과장(科場)에 들어갔을 때 척족(戚族)되는 사람이 지공거(知貢擧)로서 정지성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과거를 포기하고 말았다.

정지성의 관직은 83세 때 노인의 대우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라는 이름뿐인 직책을 받았으나, 초야에 묻힌 선비로서 18세기 당시 사회를 우국(憂國)의 시각으로 파악하면서 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문암집(文巖集)』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칠실공담(漆室空談)은 정지성의 개혁정신을 담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정지성의 초기 실학적인 사상은 족손인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져 실학(實學)이 집대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지성의 학문은 세간에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주(榮州) 사계서원(泗溪書院)을 중심으로 그 지역 선비들에게 읽혀지고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문암집(文巖集)』이 있다.

참고문헌

『문암집(文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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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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