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가 65세 때 경기도 용인의 보개산 절에서 지은 작품이다. 오언고시로 『어우집(於于集)』 권2에 수록되어 있다. 『대동시선(大東詩選)』 권3에는 ‘늙은 과부(孀婦)’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본래 시의 제2연과 제3연이 바뀌어 있다.
이 시는 인조반정 후 광해군 복위운동의 연루자로 유몽인이 무고(誣告)를 입고 문초를 받는 자리에서 읊었다는 일화가 『소화시평(小華詩評)』 등에 전한다.
“나이 일흔 늙은 과부 홀로 빈 방 지키니/옛 여사 시 외고 부덕을 익혔더라/재혼하라들 권하여 잘난 남자 맞추려 하나/쪼그랑에 모양냈자 연지분이 무색찮겠나(七十老寡婦 單(端)居守空壺 慣讀(誦)女史詩 頗(稍)知妊姒訓 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이 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우의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정조는 이 시를 두고 이소(離騷)의 남은 뜻이 있어 김시습(金時習)의 시와 백중하다고 논평하기도 하였다. 하겸진(河謙鎭)은 『동시화(東詩話)』 권2에, 유몽인이 양주로 망명하였다가 무신년(인조 6)에 유효립(柳孝立)에 연루되어 잡혀와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김상헌(金尙憲)이 옥관(獄官)으로 문초하는 자리에서 이 시를 외웠다는 일화를 적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