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1년(태종 1) 생원시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07년 정랑(正郞)으로 지내다가 병조정랑 박희종(朴熙宗)과 다투어서 파직되었다.
이후 경승부(敬承府) 소윤(少尹)을 맡았다가 세자전(世子殿)에 몰래 출입하는 사람을 통제하지 못해 다시 파직되었다. 복직 시기는 기록이 없지만 1415년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민무휼(閔無恤) · 민무회(閔無悔) 형제 등의 죄를 청하는 기록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좌부대언(左副代言)과 좌대언 · 우대언을 거쳐 1426년(세종 8) 지신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뇌물 문제로 연루되었던 관리 중에서 홀로 파직되었다. 다음 해 강원도 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429년 진헌사(進獻使)로 임명되어 한확(韓確)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계속해서 병조참판, 평안도 감사에 임명되었으나 거짓 보고로 파직되었다. 이 문제로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환수되었지만, 세종은 처벌 후 4개월도 안 되어 모두 돌려주었다.
다시 충청도 감사와 호조참판, 한성부윤, 전라도관찰사, 전주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조종생이 관직 생활 동안 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계속 주요 관직에 임명된 것은 세종의 신뢰가 깊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조말생의 동생이라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1436년 62세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