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원병한 명나라에 보은하는 뜻에서 1684년(숙종 10)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사무사(思無邪)’,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藩邦)’, 효종의 비사(批辭)를 송시열(宋時烈)이 직접 쓴 ‘일모도원지통재심(日暮途遠至痛在心)’, 낭선군 우(朗善君俁: 선조의 손자)의 친필인 ‘조종암(朝宗嵒)’ 등 22자를 가평 군수 이제두(李齊杜)와 허격(許格) · 백해명(白海明) 등이 바위에 새기고 ‘조종암’이라 하였으며, 1804년(순조 4) 기실비(紀實碑)를 세웠다.
1831년 명나라 9의사(義士)의 후손인 왕덕일(王德一) · 정석일(鄭錫一) · 풍재수(馮載修) · 황재겸(黃載謙) 등이 이곳에 와서 지방유림 등과 함께 조종암 근처에 새로 제단을 만들고,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라 명칭하였다. 그 후 이곳에서, 매년 음력 1월 4일(명나라 건국일)에는 명나라 태조에게, 1월 6일에는 명나라 9의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1874년(고종 11) 유중교(柳重敎)가 문인들과 같이 찾아와서 이항로(李恒老)가 정자를 지으려던 바위에 ‘견심정(見心亭)’이라 새기고, 『조종암지』 편찬을 그 문인 김영록(金永祿)에게 명해 다음해에 완성하였다.
1876년 김평묵(金平默) · 유중교 · 유중악(柳重岳) · 유인석(柳麟錫) · 이성집(李聲集) 등이 조종암 근방에 옥계구곡(玉溪九曲)을 정하고 그 곳에 집단 이주, 자양서사(紫陽書社)를 개설하였다. 이 자양서사는 몇 년 후 유중교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에 이주하면서 그 곳에 이건, 자양영당(紫陽影堂)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1908년 서울 비원 안에 있는 대보단(大報壇)과 괴산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가 철폐당한 뒤에도 비밀리에 제향을 계속하다가 1934년부터 절사(絶祀)되었다. 1958년 가평 지방 유지의 발기로 옛 터에 다시 제단을 보수하고 음력 1월 4일 대통묘(명나라 태조 · 신종 · 의종)와 9의사 제향을 지내고 있다.
경내의 건물은 대통묘 · 신문(神門) · 조종재(朝宗齋) 등이 있다. 대통묘의 중앙에는 명나라 태조 · 신종 · 의종을 주벽(主壁)으로 봉안하고, 동편에는 김상헌(金尙憲) · 김응하(金應河) · 홍익한(洪翼漢) · 임경업(林慶業) · 이완(李浣)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 이항로 · 유인석 등 조선문무(朝鮮文武) 9현을, 서편에는 왕미승(王美承) · 풍삼사(馮三仕) · 황공(黃功) · 정선갑(鄭先甲) · 양복길(楊福吉) · 배삼생(裵三生) · 왕문상(王文祥) · 왕이문(王以文) · 유계산(柳溪山) 등 명나라 9의사를 종향하고 있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 19일에 봉행(奉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