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집 ()

윤집 초상
윤집 초상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수찬, 이조정랑, 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성백(成伯)
임계(林溪), 고산(高山)
시호
충정(忠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6년(선조 39)
사망 연도
1637년(인조 15)
본관
남원(南原)
주요 관직
수찬|이조정랑|교리
관련 사건
병자호란
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수찬, 이조정랑, 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 · 고산(高山). 윤우신(尹又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리 윤섬(尹暹)이다. 아버지는 현감 윤형갑(尹衡甲)이며, 남양부사 윤계(尹棨)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해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 문과주1로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 · 교리(校理)에 오르고 헌납(獻納)을 역임한 뒤, 1636년 주2 · 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3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주4승지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해 주5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주6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했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했으며, 국왕이 대간(臺諫)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해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윤집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 · 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처음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주7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송자대전(宋子大全)』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병자록(丙子錄)』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둘째 등급. 정원은 일곱 명으로, 정팔품의 품계를 받았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이조에 속한 정오품 벼슬. 정원은 2명으로 병조 전랑과 함께 인사 행정을 담당하였다. 우리말샘

주3

화해(和解)하는 의론. 우리말샘

주4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던 일. 우리말샘

주5

사관(史官)이 적던 필법(筆法). 한자를 사용하여 써 내려간다. 우리말샘

주6

중국 남송(南宋) 초기의 정치가(1090~1155). 자는 회지(會之). 악비(岳飛)를 죽이고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하면서 금(金)과 굴욕적인 화약(和約)을 맺어 뒤에 간신으로 몰리었다. 우리말샘

주7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면. 부여군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북부와 서부는 대부분 낮은 산지이며, 천보산이 솟아 있다. 교원천과 홍산천이 남쪽 경계의 금천으로 흘러들며, 그 상류에 저수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로 하천 주변의 넓은 평지에 농경지와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특산물은 딸기, 밤, 인삼 따위이다. 서천 공주 고속 도로가 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4번 국도, 611번 지방도, 613번 지방도가 남부에서 만난다. 문화재로 부여 홍산현 관아(扶餘鴻山縣官衙), 홍산 태봉 산성(鴻山胎封山城) 등이 있다. 2018년 부여군 통계 연보를 기준으로 면적은 23.90㎢.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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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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