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찬한 ()

현주집
현주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승문원제조, 좌승지, 선산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선술(善述)
현주(玄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2년(선조 5)
사망 연도
1631년(인조 9)
본관
한양(漢陽)
주요 관직
좌승지|선산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승문원제조, 좌승지, 선산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조방언(趙邦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옥(趙玉)이고, 아버지는 조양정(趙揚庭)이며, 어머니는 한응성(韓應星)의 딸이다. 위한(緯韓)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에 제수되고 이어서 전적, 형조·호조의 좌랑, 사간원정언, 영암과 영천(榮川)의 군수 등을 역임하고,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에 임명되어 호남·영남 지방에 들끓는 도적의 무리를 토평,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동부승지로 전임되었다.

이 무렵 광해군의 정사가 극도로 문란하여지자 외직을 청하여 상주목사가 되었다. 인조반정 후 형조참의에 제수되고 승문원제조를 겸직하였다. 다음해 좌승지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었다.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였으며, 특히 시부(詩賦)에 뛰어나 초한 육조(楚漢六朝)의 유법(遺法)을 터득하였다.

말년에 서도를 즐겨 종왕(鍾王: 鍾繇와 王羲之)의 글씨에 비유되었다고 한다. 권필(權韠)·이안눌(李安訥)·임숙영(任叔英) 등과 교우하였으며, 후진으로 이경석(李景奭)·오숙(吳䎘)·신천익(愼天翊) 등이 있다. 장성 추산사(秋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현주집』이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