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계량(季良). 승지 조희보(趙希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조형(趙珩)이고, 아버지는 조상개(趙相槩)이며, 어머니는 오정한(吳梃漢)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7년에는 설서(說書)로서 세자의 학문 증진과 도덕 함양에 기여하였다. 1722년(경종 2)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이듬 해 홍문록(弘文錄) 15인 중 1인으로 선발되었다. 그 뒤 1724년에는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한 뒤 응교(應敎)·사간(司諫)·교리(校理)를 지내면서 불합리한 조정 대신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727년(영조 3) 동부승지(同副承旨)·승지(承旨)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 때 북상(北商)에 의해 자행되는 은의 유출로 인한 국가 체면 손상을 우려하였다. 이어 1730년에는 대사헌·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대사간을 거쳤다.
이듬 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정사(正使) 이의현(李宜顯)·서장관(書狀官) 이구휴(李龜休) 등과 함께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732년에는 강원감사(江原監司)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대관령 이서 지역 민역(民役)의 절반을 전포(錢布)로 할 것, 역졸의 삼수량(三手粮)을 병행하지 말것, 오랜 동안 흠결로 남아있는 고성(高城)·홍천(洪川)의 진휼곡을 탕감해 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1734년에도 강원감사로 재직하면서 백성의 고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뒤 1738년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같은 해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임명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이듬 해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제조(提調)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