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여숙(與叔). 호는 단포(丹圃). 승문원판교 조익(趙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좌랑 조응공(趙應恭)이고, 아버지는 승지 조원(趙瑗)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이준민(李俊民)의 딸이고, 형은 참판 조희일(趙希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6년(광해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박사·전적, 공조좌랑 등을 거쳐 서산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성균관직강·공조정랑, 봉상시·장악원의 첨정, 사옹원·사도시·군자감·장악원의 정을 역임하였다.
1644년 9월 청송부사로 재임 중에 66세를 일기로 관아에서 죽었다. 그는 성질이 엄중하고 소행이 확고하여 오직 일의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권력에 흔들리거나 남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사귈 바 못된 사람들과는 아무리 권요귀현(權要貴顯)이라 할지라도 고개를 돌려 상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대간을 모독하고 조정을 농간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형 희일이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좌되어 오지로 유배되자 사태가 매우 불측함을 알고 화를 모면할 궁리 끝에 대북파의 인물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여 7년 만에 드디어 형을 구제, 방환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서사(書史)를 즐기고 전분제자(典墳諸子 : 삼황오제와 제자백과의 서)로부터 패사소설(稗史小說)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그 저작이 매우 많았으나 난리를 겪으면서 많이 유실되었다. 저서로는 『단포유고』가 있다.